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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우
해인사의 키 큰 소나무 꼭대기를 밟으며 마구 내닫는 세찬 바람이 무서운 소리를 낸다. 꼭대기 가지들이 바람고문을 당한다. 뒤이어 처마 끝 풍경이 댕 댕 울고 산죽들이 드러눕고 새파란 하늘가로 구름떼가 쫓겨 달아난다.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씨다. 남덕유산에서 내려와 시간이 남아 들른 해인사다. 목 티와 목도리, 옷에 달린 모자까지 덮어 가리고 옆으로 고개를 돌릴 수가 없어 앞만 보고 걷는다. 내일 있을 법회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법당 주위에 바람막이 야외 천막을 치느라 애쓰는 스님들이 보인다. 법당에 앉을 자리가 모자라 늦게 오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였다.
설경사진을 찍고 산을 보러 중무장을 하고 사진동호인들과 새벽 4시에 나섰다가 6시가 넘어서야 덕유산 주차장에 도착했다. 상가도 문을 모두 닫았고 주차장은 통째 우리 것이었다. 그래도 한 두 명은 숙박을 했는지 여명 속에서 스키를 타고 있었다. 현지의 전광판은 -9.5도를 가리킨다. 1614m의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 높은 산, 산위의 온도는 -17도 쯤 된단다. 직장 다니는 회원에 맞추어 일요일로 출사 날을 정하니 제일 추운 날에 딱 걸렸다. 옛날 동상 걸렸던 발이며 손이 시림을 많이 탄다. 꼭 맞는 신발은 발이 더 시리다. 폼이고 나발이고 보트 같은 아들놈의 260미리 등산화를 신고 두툼한 모직 양말을 신었고 털 바지에 발등에 성능 좋은 핫팩을 붙였다.
이번이 덕유산 겨울출사 3번째다. 첫 번째 해는 눈이 막 오고 그친 뒤였고 날씨는 포근한 편이었다. 푹푹 빠지는 눈 속을 미끄러지며 벌렁 넘어지며 향적봉까지 올랐다. 구름이 잔뜩 끼었다가 간혹 파란 하늘이 나오곤 했다. 눈 쌓인 나무가 마냥 좋았다. 지도 선생님 말씀이 저쪽에서 들려왔다. “떡 눈은 찍지 마세요. 눈꽃을 찍으세요. 파란하늘이 나올 때 빛이 날 때 한 장이라도 찍어야 합니다.”
여기 곤돌라는 제작사가 프랑스이고 총길이는 2659m, 정원은 8명, 운행속도는 5m다. 103기가 한 시간에 2,400명을 실어 나른단다. 8시 매표 시간이 되자 줄은 길게 늘어졌다. 운행은 8시 반 부터다. 일반은 왕복 14,000원, 경로는 9,800원 나 혼자다. 할인을 받기 위해 항상 신분증을 지참한다. 식당도 8시가 되어야 아침 배식을 한다. 대구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눈 산을 가까이서 보니 참 좋다.
케이블카를 타고 15분 넘게 걸려 올라간 설천봉, 눈보라와 세찬 바람에 눈도 뜨지 못 할 지경이다. 미끄러운 빙판 바닥도 조심해야하고 시린 손도 핫팩을 만져 녹여야했다. 셔터를 누를 수 없을 만큼 카메라가 바람에 휙 돌아간다. 상제루 누각을 개방하여 대형난로를 피워놓고 방한용품과 무주군의 특산품을 벌려놓았다. 김이 슬슬 나는 오뎅과 커피도 판다. 남자들은 용감하게 눈보라 속을 헤치고 산봉우리 위를 향해 나가지만 사진이고 뭐고 손이 시려서 돌아가실 지경이다. 여기서 몸을 녹이다가 햇살이 달면 나가봐야지. 그냥 첩첩이 보이는 눈 덮인 산야만 구경한다. 이것만해도 일탈이다. 집에 있으면 그날이 그날이다. 바위나 문살에 내려앉자마자 얼어붙은 날 세운 눈 털도 재미있다. 리프트를 타고 올라오자마자 가파른 눈 절벽을 눈 깜짝할 사이에 저 아래로 내달려 지그재그로 방향을 트는 스키어들의 모양새도 재미있다.
향적봉 가는 것은 포기했다. 나만의 한 컷을 건지기 위해 곤드라 곁 가까이서 렌즈를 조절한다. 파란하늘 배경에 빨강 노랑 스키복 커다란 스키 안경 속에 눈빛은 보이지 않고 손으로 V자를 만들며 포즈를 보내온다. 점점 다가오니 반사된 안경만 번적댄다. 한 컷이라도 건져야 할 텐데……
바람은 더 세게 분다. 관리인이 바람이 많이 부니 이곳은 위험지역이라 나가라고 쫓는다. 한 컷만 더 찍고 나가마고 사정을 한다. 조심한다는 게 미끄러지며 카메라를 바닥에 부딪는다. 바디는 괜찮은데 렌즈가 이상하다. 와 골 때린다. 김이 팍 샌다. 내부주의는 내가 감수해야지. 응급조치로 스마트폰을 들이댄다. 리프트를 타고 올라온 스키어들이 일제히 내게 V자를 그리며 포즈를 취해 준다. 찰칵, 찰칵
방송안내가 흘러나온다.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서 곤돌라 운영이 어렵단다. 조금만 더 불면 운행정지 한다고 하산하라는 방송이 연신 흘러나온다. 카메라도 못 쓰고 기분이 쭈그러 들어 하행 곤돌라를 탔다. 세찬 바람 때문에 높은 기둥 지지대에 부딪칠 듯 아슬아슬하게 지난다. 만약에 시멘트 기둥에 부딪히면 큰 사고가 날듯하다. 사고를 위해 운행중지 시킬지도 모르는데 잘 내려왔다고 안도의 숨을 쉰다. 도로 올라가서 정상을 가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주차장을 빠져나오니 대형 관광버스가 40여 대나 주차 되어있다. 멋모르고 새로 들어오는 차들도 북적인다. 가는 길에 해인사의 고즈넉한 겨울 산사나 찍으며 거기서 산채 비빔밥 점심이나 먹자고 작정을 한다.
그래도 하루 일탈로 마음 구멍이 뻥 뚫려 새롭다. 탐론 렌즈는 대구에서는 수리하는 곳이 없어 서울 쪽으로 보내야 하는데, 서울로 서비스 받아 괜찮다면 좋지만 잘 안되면 어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