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글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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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icon 유병길
icon 2020-06-14 12:57:19  |  icon 조회: 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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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어둡고 컴컴하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니 희미하게 작은 버드나무가보였고 신발이 빠지는 것 같아 습지 같은 기분이 든다. 여기가 어딘지? 내가 왜 여기에 왜 왔는지? 겁이 났고 어느 쪽으로 가야 밖으로 나갈 수가 있는지 가슴이 답답하여 온다. 새소리 바람 소리 조차 없고 사방이 너무나 고요하다. 그때 어디선가 여인의 슬픈 울음소리가 간간히 들려온다. 머리털이 거꾸로 서는 것 같다. 신경을 총집중하여도 어느 쪽에서 들리는지 분간을 할 수가 없다.

한곳에만 서있을 수가 없어 어디로든 탈출하고 싶어 한 발작 한 발작 발을 내딛는데 발이 빠져서 앞으로 나가기가 힘들었다.

그때 어디선가 뚜벅뚜벅하는 큰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 내 앞에 검은 옷을 입은 덩치가 큰 사람이 나타났다. 얼굴을 보려고 고개를 드는 순간

“빨리 안가고 뭐해~”

큰소리로 욕을 하면서 나를 발로 찼다.

“아~”

나는 비명을 질렀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네~”

대답하려니 목이 아파서 말이 잘 안 나왔다.

“눈을 떠 보세요. 눈 좀 떠 보세요”

눈을 뜨니 젊은 두 여인이 내려다보고 있다.

손잡이를 잡고 일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니 일어나지 못하게 가슴을 누르며

“수술하셨어요. 가만히 계세요.”

그 순간 걸을 수가 없어서 허리 수술을 하려고 입원을 하였고 수술실에 들어간 것이 생각난다.

수술실 침대에 누웠을 때, 팔에 굵은 주사침이 꽂혔고, 마취전문 의사와 간호사가 바쁘게 움직였던 모습과 살아온 삶의 희로애락과 잘못하고 후회되는 일들이 뇌리를 스쳤던 기억과 산소마스크를 씌우며

“마취제가 분사되니 푹 주무세요.”

간호사 목소리가 생각난다.

여기가 생과사의 갈림길인가? 눈을 감는 순간, 키가 크고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저승사자가 문 앞에 서있는 것을 보았던 생각이 났다.

이제 수술을 하였으니, 걸을 수 있는 행복이 다시 왔으면 하는 간절한 희망을 가져본다.

나에게 힘든 일이 있다면 젊을 때부터 허리 디스크 진단을 받고 걷기가 힘들어 고생을 하며 살아왔다. 사십 대 초반에는 이삼십 미터를 걸으면 다리가 저려서 걸을 수가 없었다. 중학교 3년 동안 10km을 걸어 다녀서 걷는 데는 자신이 있었는데 걸을 수가 없으니 너무 힘이 들었다. 제자리에서 앉았다가 서기를 여러 번 반복하면 조금은 걸을 수가 있었다. 통증이 또 시작되면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앉았다가 서는 운동을 반복하여야 했다.

대전 모 정형외과에서 척추에 주사를 맞았다. 밤부터 5일간 꼼짝할 수도 없을 만큼 심하게 앓았다.

이십여 일이 지나자 걷기가 좋아졌다. 그때 맞은 척추 주사의 효과인가 이십여 년은 다리에 통증 없는 삶을 즐기며 산악회에 가입하여 전국의 유명 산 정상을 정복하는 즐거움을 맛보았다.

정년퇴직하던 해 삶의 변화에 대한 마음의 병 때문인가 다리 통증으로 걸을 수가 없는 증세가 또 시작되었다. 정형외과에서 진단 결과 협착증이 심하다고 하였다. 치료를 하였으나 효과가 없어 한의원에서 물리치료와 침을 맞으며 삼 개월 치료 후에 다시 걸을 수가 있었다.

30년 이상 병마와 싸우다 보니 협착증 발병에도 사이클이 있는 듯하였다. 5년에서 3년, 2년 간격으로 발병 주기가 짧아진다는 것을 느꼈다. 또 빠른 효과를 보려고 여러 곳에서 집중 치료를 받아도 삼사 개월 이상은 치료를 받아야 호전되는 것 같았다. 아픈 만큼 아파야 상태가 호전되는 모양이다.

몇 년 전부터 주위의 많은 분들이 수술을 권장하였으나, 비 수술로 이겨보려고 체형 교정, 요가, 운동치료, 마사지, 한의원, 정형외과, 신경내과, 신경외과 등 치료로 극복하며 살았다.

작년 하반기에는 이삼십 미터 걸으면 발바닥이 저려 앉아야 하는데, 앉을 곳이 없어 더 걷다 보면 엉덩이가 저려온다. 이때는 앉아야 하는데 앉을 곳이 없어 더 걷다 보면 엉덩이 근육이 마비되고 괄약근이 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경사진 곳을 올라가다가 내가 내 다리를 통제할 수가 없어 서있는 나무 기둥이 넘어지듯 한두 번 넘어져 팔 다리를 다친 일도 있었다. 지금까지 수술을 망설였지만 이제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는 한계가 온 것 같아 수술해야 할 것 같았다.

전국에 협착증 수술을 잘 한다는 선생님을 알아보았는데, 세 사람이 추천한 분이 서울 모 병원의 진 교수였다. 나도 아는 지인을 만나 허리 수술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였는데, 작년에 진 교수한테 수술 받고 좋아졌다며 수술을 권하여 수술하기로 결심을 하였다. 올해는 농사일을 할 수가 없어서 퇴직하고 지금까지 짓던 농사를 다른 사람한테 주었다.

2월 초에 서울 모 병원에서 진찰을 받고 MRI 촬영을 하고 결과를 보았다. 척추 4,5번이 심하게 협착 되어 요추 유합술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 달 후인 3월 초에 수술 예약을 하였다. 수술을 위한 9가지 검사를 담당과를 찾아다니며 3시간 이상 받고 내려왔다.

2월 18일 대구에서 코로나19 31번 확진 자가 발생하였다. 31번 확진 자와 접촉한 신천지 교인이 기하급수적으로 확진 발병되어 대구는 코로나 특별 관리 지역으로 지정되면서 모든 분야의 활동이 중단되었고, 서문시장이 100여 년 만에 문을 닫는 등 지역 경제가 위축되어 큰 걱정이었다.

2월 27일 전국에서 코로나19 확진자 1,766명이고 대구에서는 하루에 확진 자가 500여 명 이상이 되자, 서울 병원에서 수술 날짜를 2주 연기하여 3월 하순에 하자는 연락이 왔다.

3월 10일 오후에 서울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담당 교수가 4월 하순으로 또 연기를 해야겠다고 한다. 병원 방침이라 어쩔 수가 없다며 미안하다고 하였다. 가슴이 답답하여 온다. 운도 더럽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대구경북 사람이라고 서울 병원에 못 오게 하는 것을 보며 대구는 봉쇄된 느낌이 들었고, 시간을 다투는 죽을병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의 평온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급속히 늘어나는 환자 수에 비하여 턱없이 부족한 의사 간호사 등 의료진과 병실이 부족하여 대 혼란이 왔다. 전국에서 의사 간호사 등 의료진이 자원봉사로 참여하고, 119 차량과 구급대원이 대구를 도우려 찾아와서 검진과 방역, 진료에 총력을 다 하고 있으며, 다른 시 도 병원에서 확진자를 받아 주고 있어 대구 시민으로 큰 고마움을 느꼈다. 대구를 도와주려고 마스크, 의료장비, 생활필수품을 전국에서 보내주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일부 대책 없는 정치인이 대구를 봉쇄해야 한다는 막말도 하였지만, 대구 시민들은 동요하지 않고 선진시민의식으로 사재기 등을 하지 않으며, 대구시와 의료진의 의견을 듣고 예방수칙을 잘 지키며 잘 대응하였으나, 요양원 요양병원 등에서 집단 확진자가 나오고 있어 걱정이었다.

코로나19의 추세가 수그러들지 않으면 4월 하순 수술도 또 연기가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의료진의 헌신적인 봉사와 학교 개학을 미루고, 사회적 거리두기 등 예방 수칙을 잘 지킨 결과인가. 대구에서 확진자가 한 자리 숫자로 발병되고 있어 이대로 간다면 수술을 할 수가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다. 더디어 4월 20일 입원하고 22일 수술을 하였다.

다리가 저려서 움직이니 넓적다리에 벌래가 기어가는 듯 뭐가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머리를 움직일 수가 없고 목안이 아프고 입안이 마르고 말소리가 안 나와서 손으로 머리를 만져보니 목과 머리에 스티로폴로 고정되고 테이프로 감겨 있었다. 밖으로 나오니 집사람이 손을 잡고 울면서

“고생 했어. 고생 했어.”

“왜 울어”

“살아나서 살아주어서 고마워”

“왜 울고 무슨 소리야”

“나중에 이야기할게.”

병실에 와서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수술실로 들어가고 30여분 후에 수술중 이라는 문자를 받았는데, 한 시간 후에 수술실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젊은 남자가 사망한 사례가 있었단다. 젊은 여인이 수술복 가운을 입고 수술실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지인들과 이야기를 하는데, 전기충격과 인공호흡을 하여도 깨어나지 않았다며 울었단다.

문자로 상황을 알려준다고 보호자는 병실에 가서 기다리라고 하였지만, 충격적인 현실에 꼼짝 할 수가 없어 수술실 밖 의자에 앉아서 ‘우리 남편을 살려달라고 부처님 하느님 천지신명께 기도를 하였단다.’ 세 시간 반 만에 수술종료, 회복중이라는 문자를 받았는데, 네 시간 만에 나를 만났단다.

수술 이튿날 회진 온 진교수가 오후에 걷는 연습을 해보라고 하였다. 점심에 죽을 먹고 간병인의 부축을 받고 일어나서 수액 걸이 대를 잡고 걸어보니 걸을 만 한데 어지러워 침대에 누웠다. 삼일 째부터 4분 8분을 걸어도 발과 엉덩이가 저린 증상을 못 느껴 수술이 잘 된 것 같았다.

내가 있는 6인실의 환자는 모두 남자인데 간병은 부인들이 하고 있다.

80대 치매환자 부인은 남편을 달래고 달래며 밥을 먹이고 씻기고, 작년 10월에 낚시 갔다가 뇌염모기에 물려 뇌가 손상되어 겨우 눈을 뜨고 눈동자를 돌리지만 꼼짝 못하는 육십 대 후반 남편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는 부인,

남편들의 짜증을 다 받아주며 간병하는 부인들의 힘과 희생정신은 대단한 것 같았다. 반대로 부인이 중병으로 입원하여 있다면 지극정성으로 간병하는 남편들이 몇 퍼센트나 될까?

가정에서는 주부, 엄마, 아내, 병원에서는 간병인으로 활약하는 부인들의 위대한 희생정신에 대하여 찬사를 보내고 싶다.

2020-06-14 12:5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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