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유선영 소위의 마음이 무척 심란하다. 인생이란 생각보다 무척 허술하고 모순되게 구성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녀는 경남 산청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구의 육군간호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의 계획대로 되어가는 생활이 재미있었다. 게다가 임관해 야전병원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소위를 소개받아 결혼까지 하여 나름대로 삶의 보람을 느끼며 살고 있었다. 남편은 동부전선 GOP에서 근무하고 있어 외출도 잘 하지 못하고 산다. 말이 신혼이지 아직도 연애하는 기분이다. 아이도 없고 함께 살림도 하지 않으니 때로는 선영 자신도 유부녀가 아니라 미혼이라고 착각할 때도 있었다.
유 소위는 빼어난 미인형은 아니었다. 오히려 행동이나 사고에서 남성적인 면이 자주 나타났다. 하지만 은은한 그녀의 눈웃음이나 시원한 말투나 행동이 어떤 남자들에게는 굉장한 매력을 주었다. 유 소위는 엄마나 누나를 느끼게 하는 그런 여자라고 하면 설명이 간단할 것 같다. 유 소위는 스스로 인생을 '심플'하게 산다고 말한다. 사랑은 인생의 한 부분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게 그녀의 철학이다. 하지만 요즈음 그녀의 심정은 복잡해졌다. 생각도 바뀌어 사랑이 그녀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병원 정원에 매화가 피고 개나리가 피어도 예전처럼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다. 아름다움이 고통으로 느껴지게 되었다. 우태원 대위와 만나면서 나타난 증상들이다.
그녀가 처음 우 대위를 만났을 때는 보병 장교인 줄 알았다. 그의 머리 상태나 복장이 보병의 전형적 모습이었고 병원 안에서 하는 말투나 동작 역시 군인의 그것이었다. 이 무렵까지만 해도 유 소위는 우 대위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다만 여느 군의관과는 분위기가 다르다는 정도였다. 소문에 들으니 그가 입대 전 학생운동을 하였다는 말이 있어 흥미가 생겼다. 그리고 어쩌다 마주쳐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가 여러 종류의 책을 많이 읽은 것 같아 더욱 친근감이 들었다. 유 소위 역시 책이라면 열심히 읽었던 터라 둘이 만나면 이런 점에서 공통 화제가 생겼다. 만나 볼수록 우 대위에게서는 특별한 그 무엇이 느껴졌다. 좋게 보면 그는 세상을 굉장히 이상적인 곳으로 보고 그렇게 살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유 소위가 보기에는 그의 생각들이 현실과 꽤 거리가 있는 것들이며 또 왜 그가 그런 고통의 길을 굳이 가려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아마 그가 읽은 책들이 머릿속에 남아 세상의 현실과 착각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모순이 보인다. 그는 입만 떼면 세상에는 억압받는 사람, 착취당하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모든 사람은 그들 본래의 타고난 자유를 지키며 살아야 한다고 한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그 누구도 자유를 빼앗기고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놀라운 일은 그렇게 말하는 그 자신은 대체로 여자들을 깔보고 무시하는 말을 자주하는 것이었다. 여자들 뿐만이 아니었다. 게으른 사람. 정경유착 재벌, 권력 만능의 정치가, 군기를 어기는 사병, 부패한 장교, 타락한 주정뱅이 등 그가 미워하고 욕하는 사람들의 무리들이 많았다. 그러면서 만인이 평등해야 된다니 말도 되지 않는 모순이다.
유 소위는 이런 모순을 가진 태원에게서 이상한 매력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모순된 그의 생각에 대해 느낀 매력이 아니고 그가 추구하려는 순수성과 비록 손에 잡을 수는 없어도 구름을 쥐어 보겠다고 뛰는 그의 열정적인 모습이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으면서도 투박한 사투리밖에 쓸 줄 모르고 자주 만나는 간호 장교들에게 다정한 눈인사나 따뜻한 말 한마디조차 건넬 줄 몰랐다. 어떤 간호장교는 그를 냉정한 사람이라고 하고, 무례하고 건방진 사람이라고도 하였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간호 장교들을 쏘아볼 줄만 알지 부드러운 인사 한마디 할 줄 몰랐다. 그렇지만 유 소위는 그가 자주 얼굴을 붉히고 말을 삼키고 마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그녀만 그것을 느낀 것 같았다. 남들은 그가 할 말은 누구에게라도 참지 않고 뱉어낸다고 하지만 그가 많은 말을 참고 있다는 것을 유 소위만은 알고 있었다. 그가 쇼크에 빠진 환자를 인공호흡하면서 기진맥진해서 병원 응급실에 오던 그 날부터 유 소위의 가슴 한편에는 남편이란 남자 외에 우태원이란 또 한 사람의 남자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유 소위는 심플하게 산다하면서 복잡해지는 자신의 삶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자신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군대 경험이 없거나 작은 부대 생활만 해 본 사람들은 큰 부대의 정문이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곳으로 잘못 알고 볼 일이 있을 때 그쪽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곳은 높은 사람들만 차를 타고 다니는 곳이다. 대부분의 자대 군인은 뒷문을 사용하는 것이 관례이다. 하긴 조그마한 부대는 앞문, 뒷문이 없으니 모두가 평등하게 같은 문으로 다니겠지만 큰 부대에서는 그렇다는 말이다.
우 대위의 경우는 출퇴근 때 통근버스를 타지 않고 걷거나 혹은 시외버스를 타고 다녔다. 물론 출입은 뒷문으로 하였다. 군단에서는 위관급 장교가 별로 없다. 참모는 대령들이지만 숫자가 적고 사병들을 제외하면 장교는 중령, 소령이 가장 많다. 구성된 계급이 이러하니 우 대위가 출근할 때 낮익은 고참 헌병 녀석들은 건성으로 경례를 하고 웃으며 동네 아저씨 대하듯 한다. “아 지금 오세요?” 라고 할 때도 있고 “참 날씨가 덥죠?" 하고 인사를 하기도 한다. 전방이나 작은 부대서는 위병소도 자대 병력이고 군기도 바싹 들어 장교에게 이런 버르장머리를 하다가는 언제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군기교육대나 영창감이다.
군단의 경비 중대는 외곽과 울타리를 맡고 정문, 후문은 헌병대가 경비를 한다. 간이 커진 헌병들은 계급 낮은 장교는 형님 정도로 취급하였다. 어떨 때는 여름이 되어 전투복 소매를 걷을 기간인 줄도 모르고 그냥 정문을 들어가다 보면 녀석들이 양쪽에 매달려 소매를 걷어주기도 했다. 이럴 때면 우 대위는 이게 친근하다는 표시인지 장교를 깔보는 짓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화도 내지 못하고 입으로 “고마워, 고마워” 하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이곤 했다.
하지만 간혹 이런 것이 군대구나 하고 느낄 때도 있었다. 즉 장군 차나 그들의 대장 차를 타고 정문을 통과할 때면 뻔히 아는 녀석들도 소리 높여 “멸공” 하고 경례구호를 외쳐대니 ‘역시 멋있는 놈들이야’ 하는 칭찬을 자신도 모르게 내뱉게 된다.
이 녀석들이 의무실에 와서 굽신거릴 때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이 파견 나가 있는 검문소에 구호 약품이 필요할 때였다. 바로 저희가 복용해야 할 약이니까 그런 때는 와서 최대한 애교를 부리며 약을 청했다. 우 대위가 헌병대로 '영창 감사'를 갈 때는 또 다른 반응이 나타나곤 했다. 우 대위는 군단 법무부 군법회의의 상임 변호인이므로 정기적으로 군 법무관들과 헌병대 영창을 감사하러 간다. 영창에서 헌병대 병력들이 피의자들을 규정대로 대접하는지 혹은 가혹 행위는 없나 가보는 것이다. 이럴 때 보면 평소 거들먹거리던 헌병 장교들이 깍듯이 안내를 하는데 우 대위는 속으로 우스울 때가 많았다.
평소에 헌병 장교들은 어떤 장교에게나 반말을 지껄이거나 건방진 태도로 잔뜩 목에 힘을 주게 마련인데 감찰 때는 군의관인 우 대위에게도 예를 갖추어 대접하니 이것이 군대의 재미이기도 하고 멋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게 아닌가.
모처럼 태원이 나를 찾아왔다. 그날 따라 외래환자도 적고 하여 그와 이야기할 시간이 많았다. 의과대학 다닐 때 학교를 그만두니 마니 하고 한창 바람이 났을 때 보병 장교로 간다고 하던 태원이다. 병과는 달라도 지금 그 장교 생활을 하고 있으니 꽤나 적성에 맞을 듯도 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막상 군인이 되더니 또 이런저런 불평의 말이 많았다. 처음에는 분창장과 숏 테이지 문제로 입에 거품을 품더니 나중에는 대령 참모들의 횡포에 불만을 터뜨렸다. 그리고 지휘부 장군들 때문에 휴가는커녕 서울 외출 한 번 마음 놓고 못 간다며 또 죽는 소리를 하였다. 보병부대를 잘 모르는 나로서도 그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었다. 그가 전방 보병대대에서 생활할 때는 나와 교류가 없었으므로 그 시절 군인으로서의 만족도는 알 수 없는 일이다. 1년간 최전방 생활을 하면서 그중 6개월을 임진강 변 야외에서 공사를 하며 숙영 생활을 하였으니 줄거리 있는 이야기가 별로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태원은 임진강 숙영 생활을 끝내고 자대에 와서 근무할 때 결혼을 하였다.
요즘 나에게 찾아오는 횟수가 뜸하길래 이제 나름대로 새 생활에 적응을 해서 그런가 하였다. 그날 보니 그의 얼굴이 어쩐지 밝아 보이지 않았다. 왠지 생각이 많아 보였다. 우리의 대화는 건성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는 전처럼 죽겠다거나 고생스럽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타협을 한 건지 극복을 한 건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그는 학생 때부터 불평불만이 많고 이죽거리기는 했지만 내용을 자세히 들어보면 그래도 자신이 옳다는 것이고 그래서 투쟁해야 된다고 했지 그런 일로 기가 죽거나 포기한다는 말을 잘 들을 수 없었다.
그 날은 그가 불평 없이 “그저 그래요. 견딜 만해요. 잘 돼가요”라고 이야기하자 나는 오히려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아침에 열이 펄펄 나던 환자가 오후에 까닭 없이 열이 떨어지면 예후가 나쁜 경우가 많다. 죽는 경우가 많다는 말이다. 조용하다. 별일 없다는 말이 문제가 없는 경우에 주로 쓰는 말이지만 가끔은 문제가 어려워 풀 수가 없을 때도 쓰는 말이다. 건성으로 인사말만 하고 그는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