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12월 서른한 명의 가솔을 이끌고 망명길에 오른 백하 김대락 선생. 66세의 노구의 몸으로 삭풍이 몰아치는 압록강을 건너 도착한 서간도 회인현 향도촌에서 뒤이어 망명해 온 석주 이상룡 선생과 합류하여 독립운동 기지로 삼을 유하현 삼원포로 옮겨 정착하였다.
협동학교 문제로 지체되어 뒤늦게 삼원포에 도착한 일송 김동삼 선생이 백하 선생과 합류함으로써 노유(老儒) 백하와 청년 일송은 이국 땅 삼원포에서 새로운 독립운동의 길을 개척하게 된다.
백하 선생은 ‘사람 천 석, 글 천 석, 살림 천 석’이라 해서 '삼천석댁'으로 유명했던 내앞마을의 권문세가인 의성 김씨 가문의 장자로 태어났다. 서산 김흥락 선생에게 수학하였고, 그 과정에서 위정척사 사상에 바탕을 두고 의병을 지휘하던 스승의 영향을 받아 전통적인 선비로 살았다. 그러한 선생이 대한협회보를 읽고, 사상의 혁명적 전환을 맞았다. 이때가 이순을 넘긴 나이였다. 이로써 백하 선생이 영남유림의 개화에 끼친 영향은 실로 컸다.
국권이 일제에게 침탈되고, 향산 이만도 선생 같은 선비들의 자정순국을 보면서 백하 선생은 망명을 결심하였다. 선영을 지킬 몇 사람을 남겨둔 채 노비를 풀어 주고, 전장을 처분하여 망명길에 오른 것이다. 선생을 따라 삼원포로 망명한 내앞마을 사람들은 일곱 차례에 걸쳐 150명에 이르렀다.
백하 선생은 삼원포에서 이상룡, 이회영 선생과 함께 서간도 최초인 경학사를 조직하고,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하여 신흥강습소를 열었다. 1912년 2월 초 통화현 합니하로 이주한 백하 선생은 한인 지도자들과 함께 그해 6월에 신흥무관학교를 열어 훗날 청산리대첩에 참여하는 많은 독립군을 길러냈다. 1913년 2월 합니하에서 삼원포로 돌아온 백하 선생은 경학사가 무너지면서 생활고에 처한 동포 사회를 재건하기 위하여 일송 선생등과 새로운 자치조직인 공리회를 결성하고 취지서를 작성하였다.
백하 선생은 1914년 12월 10일 서간도 삼원포에서 향년 70세로 별세하여 그 땅에 묻혔다. 선생은 망명 생활을 기록한 「백하일기」를 남겼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석주 이상룡 선생의 부인 김우락, 향산 이만도 선생의 자부 김락 여사가 백하 선생의 누이들이다. 두 누이 역시 독립 유공자이다.
내앞마을 백하구려(白下舊廬)에서 만난 백하 선생의 종증손인 김시중(82) 옹은 “몇 해 전에 만주 항일운동 유적지 탐방차 삼원포에 가서 할아버님 무덤을 찾으려 했으나 끝내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당시 묘비라도 세웠더라면 찾을 수 있을 건데 일제의 훼방으로 그리 못한 것이다. 그래서 영남 유림들이 힘을 합해 의관장(衣冠葬)으로 내앞마을에다 모셨다”고 하며, 이에 덧붙여 “신흥무관학교가 섰던 자리를 찾아 가니, 옥수수 밭인데 표지석, 아니 말목 하나 세워 놓지 않았더라. 중국이 동북공정을 한창 내세우던 시절이라 오히려 공안이 와서 조사하는 바람에 울분이 치솟더라”며 울먹였다.
일송 김동삼 선생은 1907년 류인식 선생을 중심으로 김병후, 하중환과 함께 3년제 중등교육과정인 협동학교를 설립하여 청년들에게 신교육을 시켰다. 이 학교에서 일송 선생은 학생들을 가르치며 교감을 맡기도 하였다.
나라를 잃은 후, 백하 선생과 의논하여 망명하기로 하고. 1911년 백하 선생에 뒤이어 삼원포로 망명하였다. 당시 선생의 나이 33세였다. 선생은 석주 선생 등과 경학사.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였고, 1914년에는 독립군을 양성하는 백서농장을 설립하여 장주가 되었다. 1918년에는 서일· 김좌진 장군 등 민족 대표 39인이 서명한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1922년 민족 단일의 독립운동 단체인 통군부를 조직하고 교육부장에 임명되었고, 통의부가 조직되자 위원장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1923년 상해에서 독립운동자 총회인 국민대표회가 열릴 때 서로군정서 대표로 참가하여 의장을 맡았는데, 당시 부의장은 도산 안창호였다. 1924년에는 전만통일회의 주비위원회를 열고, 의장이 되어 그해 11월에 정의부를 탄생시켰다. 1929년에는 민족유일당 결성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렇듯 선생은 항일 무장투쟁에 주력하면서 분열된 독립운동 세력의 대통합을 위해 헌신한 민족 지도자였다.
1931년 말에 일제 밀정의 고발로 하얼빈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10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37년 60세의 나이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평소 선생을 존경하던 만해 한용운 선생이 그 유해를 수습하여 화장한 후 유골을 유언대로 한강에 뿌렸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내앞마을 출신으로 독립 유공자로 포상된 인물만 18명에 달한다. 아직까지 포상되지 못한 30여 명과 만주 망명 당시 함께했던 여성들을 포함하면 그 수는 늘어날 것으로 보이다.
김시중 옹은 “만주로 망명가면서 가산을 처분했기 때문에 해방되어 망명에서 돌아왔을 적에는 끼니를 잇지 못할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다. 나 역시 배를 곯았는데, 술도가에서 술 막지를 얻어먹고 취한 일도 있었다”고 과거를 회고하며, “일송 선생은 순수한 열정으로 일제와 싸우다 순국하신 분이다. 그런데 선생 생가에 표지판 하나 달랑 세워져 있을 뿐이다. 나라에서 작게나마 일송, 백하 기념관을 건립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말했다.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하면 3대가 흥한다는 말이 있다. 이런 말이 생긴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독립운동한 집안을 살펴보면, 그 후손들의 삶이 곤고하기 이를 데 없는 경우가 많다. 독립 운동으로 애국한 선현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우리가 나라를 지키며 살 수 있을까. 애국의 대가는 말뿐이 명예로는 안 된다. 실질적인 예우가 필요하다. 다만 철저한 조사와 엄격한 심사를 거쳐 유공을 가려서 예우하고 현창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