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날마다 사용하는 ‘말’은 ‘생각이나 느낌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음성 기호’이다. 다시 말해서 ‘의미’를 전달하는 음성 도구가 ‘말’이다. 그러므로 같은 의미지만 조금씩 다른 목소리(도구)를 사용한다. 예를 들자면, ‘밥’을 유아들에게는 ‘맘마’라 하고, 일반적인 성인들에게는 ‘식사’라고, 어른들에게 ‘진지’라고 한다. 전달하는 의미는 같지만 전달 도구인 음성(말)은 다르게 사용한다.
‘언어의 임의성’이다. 음성과 의미, 또는 언어 기호의 형식과 의미 사이의 관계는 필연적이거나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관습에 의해 형성되는 현상이다. 한국 사람들이 ‘집’이라 하는데 미국사람들은 ‘하우스’라고 하는 것도 임의성, 또는 자의성이다. 이러한 말의 임의적인 사용에는 사회적인 약속에는 이라는 원칙이 있다. 내가 ‘집’이라고 말하거나 글자로 쓰면 하면, 상대방도 똑같은 의미로 알아듣는 것이 사회적 약속, 즉 ‘언어의 사회성’이다. 이러한 원칙이 없으면 그 말은 의사소통의 가치가 없는 공허한 소음이 되고 만다.
요즈음 온라인에 임의성은 있으나, 사회성이 부족한 단어가 발견된다. 말을 너무 임의로 사용해서 평범한 한국인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 현상이다. 온라인에서 이런 예문이다.
① 신분당선의 장점과 단점 (feat. 요금) : 편리하지만 요금이 비싸다는 뜻.
② 하지가 언제인가요? (feat. 일출몰 시간) : 하지의 날짜와 일출 일몰 시간을 명확하게 알려달라는 요청.
③ 여권발급(feat. 군 면제) : 군 면제를 중점으로 해서 여권 발급을 설명해 달라.
④ 허리둘레 5cm 늘 때마다 사망률 10% 증가, 해답은 복근 운동에서!(feat.제이피트) : 제이 피트를 주목해 달라는 요청, 선전, 광고
⑤ 저도 카플레이 활성화 했습니다(feat. 성남피트웍스) : 성남피트웍스 선전, 광고
이와 같은 5가지 예문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영어 단어를 그대로 사용한 ‘feat’이다. ①에서 ⑤까지의 feat를 우리말로 바꾸면, ‘핵심, 요점, 중점, 특징, 주목’ 등의 뜻이다. 이렇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우리말을 두고 왜 영어 단어, feat를 사용하는가? ‘무엇인가 멋있어 보이려는 심리’가 크게 작용하기 때문에 임의성의 한계를 넘어선 경우이다. 임의성의 한계를 넘어서면, 사회성이 빈약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말하는 사람이 좀 멋있게 한 마디 했으나, 듣는 사람이 무슨 뜻이지 쉽게 알 수 없게 되어 의사소통이 실패로 끝나게 된다.
요즘 젊은 세대들이 즐겨 사용하는 영어의 feat는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이 노래할 때 그 노래를 도와주거나 주고받은 대화식 노래를 ‘featuring’이라고 하고, 이를 줄여서 사용하게 된 변용(變容)이다. feat라는 단어는 명사로 ’공훈, 위업, 묘기, 곡예‘ 등의 뜻이 있고, 형용사로는 ’교묘한, 능숙한‘ 이라는 뜻이 들어있다. feat와 같은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 즉 ’말은 같으나 뜻이 다른 단어‘이다. 동음이의어는 문맥이 의미를 좌우한다. 영어에서 feat의 의미도 전후에 연결되는 단어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진다.
사전에 나오는 ① a feat of arms; 무공, 무훈 ② a diplomatic feat; 외교적 위업 ③ a feat of agility; 날쌘 재주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요즘 젊은 층들이 즐겨 사용하는 ‘대박!’을 영어로 옮기면, ‘a huge feat’, 즉 ‘크게 멋지게 이루어진 일’이다.
한국 사회에 언어의 임의성이 확장되고 사회성이 빈약해지는 현상은 현대 한국인들의 삶의 반영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삶의 깊이보다 표면적인 화려함이 우선되고 있다. 또한 일회성과 즉시성(卽時性; instant) 전성시대의 산물이기도 하다. 가마솥에 오래 불을 지피듯 오랜 시간 심사숙고하는 말과 행동보다, 전자 레인지를 사용하듯 빠르고 날렵하게 처리하는 것이 돋보이는 시대이다. 그리고 한 번 쓰고 바로 버리는 일회성이 대세를 이루는 삶을 반영하는 현상이다. 가볍고 얇아진 생각과 행동이 빠르게 회전하는 현실이 언어에 반영되고 있다. 과연 우리 삶의 본질이 즉시성, 일회성인가?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심오한 화두가 이렇게 해석되어야 하는가? 삶의 길은 축구 선수가 자신이 찬 공을 향해서 돌진 하듯이, 늘 의문을 던지면서 그 물음을 따라 가는 길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