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냄새, 사람 냄새나는 얘기 쓰고파
뿌리를 알면 말과 행동이 달라져
농업은 모든 일의 근본이라는 말이 잊히는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식량은 무엇보다 중요한 우리 산업이다. 예부터 밥을 하늘이라 하지 않았던가.
유병길(74) 작가는 상주가 고향이다. 그는 지금도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흙냄새 나는 꾸미지 않은 글을 쓰는 동화작가이기도 하다. 유병길 작가는 농업기술센터를 정년퇴임하고 2004년 혜암아동문학교실에서 공부했다. 이후 <월간 신문예>에서 신인상을, 매일신문이 주최하는 ‘매일시니어 문학상 논픽션 부문’에서도 수상하였다. 시집 『두렁에 청춘을 불사르고』, 산문집 『옛날이야기로만 남을 내 어린 시절』, 소년소설 『할머니와 반짇고리』가 있다.
가을이 깊어가는 시간, 유병길 작가를 만났다. 오랜만에 입은 정장이 어색하다고 했지만 ‘벼와 인생’을 담은 주머니에서는 갖가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통일벼 전도사
농업기술센터에 막 입사한 풋내기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서울대학교 허문회 교수가 '통일벼' 개발에 성공했지요. 당시에 일본이 그렇게 애써도 하지 못한 것을 해낸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먹는 자포이카 종과 동남아의 인디카 종 을 교배한 것이 통일벼였습니다.
1972년에 그 종자가 각 시군으로 배정됐습니다. 경북 상주로 발령이 나서 통일벼 볍씨를 처음 받았습니다. 하지만 지대가 높은 곳이라 아무도 심으려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결국 우리 집과 처가에 가서 장모님을 설득해서 통일벼 볍씨를 뿌렸습니다. 젊은 패기였지만 일 년 농사를 망칠 수 있다는 생각에 좌불안석이었습니다.
통일벼는 일반 벼에 비해 작고 잎이 넓으며 가지치기를 잘하였습니다. 이삭이 패기 시작하며 논에 가보았더니 이삭에 달린 알곡 수가 일반벼에 비해 눈에 띄게 많았습니다. 첫 수확을 하고 높은 분들을 모시고 처가에서 '통일벼 시식회'를 가졌습니다. 농촌지도소장, 면장, 작물 계장 등 그때 온 사람이 스무 명 정도 됐습니다. 갓 지어낸 밥을 수북하게 그릇에 담았습니다. 김이 오르는 따끈따끈한 밥이라 '밥맛'에서도 후한 점수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퇴근해서 저녁에 식은 밥을 먹어보니 우리 쌀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차지지 않아 맛은 많이 떨어졌습니다.
그해 통일벼 수확량은 믿기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보통 천이백 평 농사를 지으면 뒤주의 반 정도를 채웁니다. 그해에는 뒤주를 가득 채우고도 쌀이 남아 함석으로 간이 뒤주를 만들 정도였습니다.
상주, 청도 곳곳을 누비며 '통일벼의 전도사'를 자처했습니다. 첫해에 늦게 심어 실패한 청도에서는 통일벼를 심지 않으려는 농민들과 숨바꼭질도 많이 했습니다. 통일벼 종자를 담가놓고 다음 날 가면 다시 일반 벼를 담가놓았습니다. 그렇게 통일벼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며 ‘보릿고개’가 사라져 갔습니다. 이제 밥을 굶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시절에는 '하얀 쌀밥'을 배부르게 먹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장티푸스와 두 분의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
제 책을 읽는 독자들이 제 작품은 따뜻한 아랫목에서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듣는 느낌이 난다고 합니다. 제 어린 시절은 늘 할머니와 함께 떠오릅니다. 저를 낳고 육 개월 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장티푸스에 걸린 아버지를 간호하다 어머니가 장티푸스로 돌아가신 겁니다.
그렇게 갓난쟁이인 저를 거두어 키우신 분은 할머니였습니다. 할머니는 저를 안고 마을을 다니며 동냥젖과 암죽으로 저를 살리셨습니다. 제가 다섯 살 무렵, 제게 새 어머니가 생겼습니다.
그 이듬해 전쟁이 나며 상주에서도 피난길에 나서야 했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동생이 갓 태어난지라 아버지와 함께 친정에 머물렀지요. 저는 할머니 손을 잡고 낙동강을 건넜습니다. 흩어지지 않게 서로 허리를 새끼줄로 동여매고 강을 건넜습니다. 밤에는 강 양쪽 하늘에서 피어오르는 붉은 불꽃과 굉음에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전쟁의 기억은 어린 제게 그렇게 생생하게 새겨졌습니다.
문학청년의 꿈
공무원으로 근무하며 틈틈이 글을 써 발표했습니다. 저는 기록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지금도 수첩이며 공책에 빽빽하게 저의 일상을 정리해 놓습니다.
퇴임 후 우연히 혜암 최춘해 선생님의 문학교실을 찾게 되었지요. 혜암 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며 동시도 쓰고 동화도 썼습니다. 무엇보다 ‘마음’ ‘정’을 강조하시는 혜암 선생님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저는 지금도 고향 상주에서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농사를 지으며 녹슨 농기구에서 영감을 받기도 하고, 고개를 숙이며 익어가는 벼에게 지혜를 배우기도 합니다. 저는 잊혀 가는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습니다.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에서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옛 것의 소중함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요?
저는 사람 냄새, 흙냄새나는 이야기가 좋습니다. 아마 '흙의 시인'이라 불리는 혜암 선생님의 영향도 컸겠지요.
뿌리를 기억하는 일
직장에 근무하면서도 시사(時祀)에 빠지지 않고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참여하는 종친의 수가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짚어보았습니다. 일단 날짜가 평일인 것이 문제였습니다. 날짜를 10월 첫째 주 일요일로 정하고, 종손이 준비하던 모든 제수를 주과포로 간소화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웃어른들로부터 흔쾌히 승낙을 받았습니다. 이듬해 전화로 참석을 독려하여 16명이 참석하고 보니 점심이 문제였습니다.
가까운 식당에서 점심을 주문해서 먹자니 밥값이 걸렸습니다. 당시 성서공단에서 사업을 하던 유억식(73) 전 대표가 흔쾌히 내년 밥값을 부담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이듬해 추석에 도착하도록 '시사 날짜를 알리는 편지'를 써보냈습니다. 그렇게 1994년 시사에는 60여 명의 종친이 참석했습니다.
그 후로 이듬해 점심은 내가 부담하겠다는 종친들이 늘어나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나의 뿌리를 안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내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인식한다면 말과 행동도 달라지겠지요. 저는 그런 의미에서 종친끼리 만나 인사를 하고 제를 올리고 밥을 나누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제 동생과 아이들에게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기억하라고 합니다.
미래 세대에게
이제 밥을 굶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살을 빼느라 끼니를 거르고, 아예 아침도 먹지 않는 청소년들도 많다고 하지요.
저는 밥이 하늘이라고 생각합니다. 농업은 우리 삶의 근본이며 생명입니다.
우리는 밥을 나누며 마음속 생각도 읽고 상대방의 감정도 알게 되지요. 저는 아무리 쌀이 남아나더라도 우리 먹거리만큼은 우리 땅에서 심고 자라는 우리 것을 먹었으면 합니다. 특히 쌀의 경우에는 더 말할 나위 없지요.
이제 농부들이 연로해져서 일을 할 사람이 적습니다. 저는 젊은이들이 조합 형태를 만들어 농사를 짓고 그 수익의 일정 부분을 나누는 그런 방법을 제안합니다. 점점 연로해 가는 우리 농촌을 지키기 위해 정부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여러 의견이 모아지기를 바랍니다.
여전히 농부이기를 고집하며 우직하게 흙냄새 나는 이야기를 전하는 유병길 작가에게서 고향의 향기가 전해진다. 따뜻하고 살맛 나는 할머니의 품 같은 고향 이야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