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하고 구려서 두엄으로 내기에도 부적합이라고 했다.
꿈인지 생신지 모르게 하룻밤이 지나 아침이 되자 황제는 그녀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안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길게 한숨을 쉬었다. 주책없이 이마로 흘러내린 몇 가닥 애교머리를 빗어 올리며 “어찌 그러십니까?”물었지만 연신 고개만 절레절레 젓다가 초점을 잃은 눈동자로 또 한숨이다.
따습다 여긴 자리, 꽃방석이라 여긴 자리, 꽃길만 걸으면 되겠다 싶어 가슴이 콩닥콩닥 들떠 지새운 밤이 무색하게 아침 댓바람부터 한숨 타령이다. 까닭 없는 불안이 가슴을 엄습하고 쪽빛 하늘이지만 어셔가를 뒤덮어 누르는 먹구름을 보는 듯하다. 그러고 보면 황제의 한숨은 아들들을 전쟁터에 보내고 세상을 체념한 듯 내쉬는 부모들의 한숨을 닮았다. 그 처량한 모습이 무섭고 두려워 심란하기가 그지없다.
왜 이렇게 방정맞은 생각이 들까? 나도 전쟁터로 떠나는 용사들처럼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길을 떠나야하는 걸까? 촉촉한 눈동자는 황제의 눈을 향했고 그때 그녀는 황제의 눈을 통해 생각조차하기 싫은 한 남자를 떠올리고 있었다.
이마론 주름이 짙고, 듬성듬성 서리가 내린 머리는 봉두난발처럼 어지럽다. 구레나룻이 털복숭아처럼 일었으며 몸은 짐승가죽으로 감싼 펑퍼짐한 사내가 정신이 나간 듯 희멀겋게 웃는 모습이었다. 처음 대전에서 황제를 알현하는 중에 얼핏 곁눈질로 엿본 그 사내는 오랑캐란 선입견 때문인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이윽고 마지막 삼일 째날 아침이 밝자 황제는 한숨도 모자라 거의 울상이었다. 그 뜻을 물으려 해도 고개만 내저을 뿐이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슬픔 눈, 세상에서 제일 슬픔 눈이 그녀의 눈앞에서 초점을 잃고 있었다. 손끝만 살짝 스쳐도 세상사 온갖 슬픔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다. 그렇다고 마냥 그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환관과 시녀들의 독촉이 비 오듯 하자 삼일 동안 펼쳐졌던 사랑의 무대는 막을 내린다.
잠시 후 왕소군이 목욕을 마치고 시녀들의 부축을 받아 옷매무새가 끝나자 겨울에 자신을 비쳐보곤 깜짝 놀랐다. 그때 그녀는 후궁의 복장이 아닌 공주의 복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를 바라다보는 시녀들 또한 한숨짓기는 마찬가지였다.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어 감을 느낀 그녀가 시녀를 붙잡고 물었지만 돌을 물고 높은 산을 넘는 두루미라도 된 듯 입을 굳게 다물어 슬픔표정으로 쳐다보기만 할뿐이었다.
두루미 떼가 높은 산을 넘을 때 힘든 여정을 잊고자 서로를 격려하는 차원에서 매우 시끄럽다고 한다. 그러나 이 소리는 주위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맹금류이자 독수리들을 불러들여 위기를 자초하고 종내는 몇몇 동료가 목숨을 잃는 비극을 낳는 탓에 돌을 문다고 한다. 시녀들 또한 멋모르고 제 기분에 겨워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언제 어디로 끌려가 불귀의 객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왕소군이 처한 현재의 처지를 설사 미주알고주알 안다고 해도 목숨을 부지하려면 어쩔 수 없는 처지인 것이다. 그녀의 늘어진 한숨이나 시녀들의 애달픈 한숨이나 답답하고 가련하기는 매 한가지였다.
안절부절도 잠시 시녀들이 물러가고 텅 빈 공간에 홀로 남겨진 그녀가 어지러운 마음을 다독이고 잠시 서성이는데 학수고대하던 첩지가 내려왔다. 그리고 그 첩지는 뜻밖에도 공주의 첩지였다. 결국 화번공주((和蕃公主:옛날 중국에서 정략상(政略上) 이민족(異民族)의 군주에게 출가시킨 공주))가 된 것이다.
“공주라니?”그럼 황제와는 부녀지간이 되는 것이다. 이럴 수가 있는가? 그녀의 의문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의 생각이나 의지와는 관계없이 그녀를 태울 가마가 준비 되었던 것이다.
그제야 고향을 뜨기 전 친지들이 염려하고 당부하던 말들이 불현 듯 떠올랐다. 아무도 믿지 말고 오로지 자신만 믿으라 했다. 머리에 높은 관을 쓰고 거들먹거리는 족속들은 거의 대부분이 천변만화의 얼굴, 즉 때로는 잔나비(원숭이)상으로, 때로는 늑대의 상으로, 때로는 개돼지 상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그들의 성질 또한 변덕이 죽 끓듯 하여 강자에게는 코가 땅에 닿을 듯 비굴하지만 약자에게는 한없이 강권하며 권력과 재물 앞에서는 자신의 대소변도 웃으면서 받아먹을 위인들이라 했다, 또한 그들의 대소변은 마땅히 그들이 먹어야 하며 벌레가 살수 없을 정도로 지독하고 구려서 두엄으로 내기에도 부적합이라고 했다.
가마에 앉아 곰곰이 생가해보니 들을 때는 “뭘 그럴까?”콧방귀로 흘려듣던 말들이 점점 제자리를 찾아갔고 종내는 거대한 악마의 모습으로 그 실체를 들러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점점 황제를 닮아갔고 결국 황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자신을 품고자 했다면 마땅히 후궁의 첩지를 내려야만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품고는 공주의 첩지를 내렸다. 이는 누가 보아도 이율배반이다.
거기에 ‘원증회고’라고 대전에서 잠깐 얼굴만 스친 사내랑 짝을 지웠다. 송충이를 본 듯 진저리가 쳐지고 소름이 돋는 사내다. 의사나 의견 따위는 깡그리 무시되었다. 게다가 천지분간도 모르는 이국땅으로 보내버리는 것이다. 마각을 들어낸 황제의 얼굴이 떠오르자 황제 또한 높은 관을 쓰고 거들먹거리는 자인지라 진저리가 절로 쳐져 공주의 첩지도 필요 없고 더군다나 후궁의 첩지 따위는 더욱 필요 없어 할 수만 있다면 칼을 거꾸로 물어 세상을 등지고픈 마음뿐이었다.
문득 “너는 내 색시해라!”며 진달래꽃을 따서 입에 넣어주고, 알밤을 숨겨오고, 누룽지를 숨겨와 은근슬쩍 건네고, 꽃을 꺾어 머리에 꽂아주던 고향마을의 터벅머리총각 돌쇠가 그리워진다. 어떨 때는 그 모습이 바보천치 같아 보였고 늘 가까이에 있어서 그런지 터부시로 일관한 적이 밥 먹듯 했는데 지금은 부끄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너무 그리워 눈물이 날 지경이다. 밑구멍이 찢어질 정도의 가가난만 아니었어도 지금쯤 대문마다 폭죽이 팡팡거려 터지고 동내사람들의 축복 속에 연지곤지 찍은 이마와 양 볼에 하얀 분 곱게 바르고 시집갈 텐데!
부모님의 성화를 못 이겨 궁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촌부의 삶이면 족하다 여겼다. 하루같이 무던한 돌쇠를 서방으로 맞아 연분홍 행화(살구나무 꽃)꽃 흐드러진 아래 초가삼간 지어내고 굽바자 넘어 비단조각처럼 펼쳐진 남새밭은 다시 조각조각 나누어 상추와 토마토 오이 등등 각종 채소를 심어놓고, 낮이면 밭으로 나가 지심을 뽑고 밤이면 가물거리는 호롱불 아래 바느질로 졸음이 거물거물할 즈음 “앙앙”거려 우는 아기를 다독거려 재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