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설 명절이 지나갔다. 언제부터 설날이 우리 민족의 명절이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중국의 『삼국지(三國志)』에 부여족이 역법(曆法)을 사용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신라 문무왕 대에는 중국의 방법을 가져와서 조력(造曆)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명확하지 않다. 신라의 독자적인 명절이라 할 수 있는 가위[嘉俳]나 수릿날 풍속이 있었다는 사실에서 우리 민족 나름대로 고유한 역법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중국의 태양태음력이나 간지법(干支法) 이외에 우리 고유의 역법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서, 설날은 적어도 6세기 이전에 중국에서 태양태음력을 받아들인 이후 태양력을 기준으로 설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수서(隨書)』를 비롯한 중국의 역사서에는 신라인들이 원일(元日) 아침에 서로 하례하며 왕이 잔치를 베풀어 군신과 모임을 가지고, 이날 일월 신을 배례한다고 되어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제사〉편에는 백제 고이왕 5년(238) 정월에 천지신명께 제사를 지냈으며, 책계왕 2년(287) 정월에는 시조 동명왕 사당에 배알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정월에 조상 제사를 지냈다는 것으로 보아 오늘날의 설날과의 유사성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 제36대 혜공왕(765∼780) 때에 오묘(五廟: 태종왕, 문무왕, 미추왕, 혜공왕의 조부와 부)를 제정하고 1년에 6회씩 성대하고도 깨끗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정월 2일과 정월 5일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설날의 풍속이 형성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설과 정월 대보름, 삼짇날, 팔관회, 한식, 단오, 추석, 중구(초아흐렛날), 동지를 9대 명절로 삼았으며, 조선시대에는 설날과 한식 단오 추석을 4대 명절이라 삼았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서, 설이 오늘날과 같이 우리 민족의 중요한 명절로 확고히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네이버, 지식iN)
세뱃돈을 주는 관행은 중국에서 시작되어 한국, 일본, 베트남 등으로 전파되었다고 한다. 중국에 설이 되면 결혼하지 않은 자녀들에게 '돈을 많이 벌어' 잘 살아라! 라는 의미로 붉은 색 봉투에 약간의 돈을 넣어 주는 풍습이 있었다. 중국인들에게 행운의 붉은 색으로 새해 첫 출발에 행하는 풍습이었다. 일본의 경우 에도시대에 도시에서만 세뱃돈이 있다가 고도 경제 성장시대인 60년대 이후부터 전국화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본도 역시 세뱃돈을 봉투에 넣어 준다.
체면을 중시하던 조선시대 사람들은 돈 대신 세배하러 온 아이들에게 떡이나 과일 등 먹을 것을 내주었다. 필자가 열 살 전후였던 1950년대 중반, 의성 지역의 농촌에도 이웃집에 세배가면, 아이들에게 강정 몇 개와 (안동)식혜 한 공기를 대접하곤 했다. 어른들은 정종 한 두 잔과 간단한 안주와 함께 덕담이 오고갔다. 부잣집의 경우 가끔 아이들에게 1환짜리 작은 지폐 한 두 장을 주기도 했다.
60년대부터 혁명 정부가 양력설을 강조하는 시책을 펼쳤다. 연말이 되면 양력 음력 이중과세를 하지 말자는 캠페인이 지속되었다. 그러면서 설날 세배도 조금씩 달라졌다. 음식 대접은 점점 없어지고 조금씩 돈을 주면서 세배라는 미풍양속도 점점 쇠퇴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우리 선조들은 아이들에게 세뱃돈을 줄 때 겉봉에 반드시 ‘책값’ ‘붓값’ 이라고 어디에 쓸 것인지 용도를 적어서 격려의 덕담과 함께 주었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돈을 가치 있게 쓰도록 가르치는 지혜가 있었던 것이다.
세뱃돈은 미풍양속에 대한 순수한 마음이 흐려지고 교환가치로 변질되기 쉽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세배 방식도 달라져야 할 것이다. 조손(祖孫)이 함께 하는 세배, 즉 수직관계가 아니라, 상호존중하는 마음으로 윗사람도 동시에 하는 세배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세뱃돈 봉투를 주면서 “세배는 우리 모두가 서로 존중하는 마음의 표시이다. 그리고 이 세뱃돈에는 선조들의 정신도 들어있다. 너희들도 우리 가문을 훌륭하게 이어가겠다는 마음을 간직하기 바란다!” 라는 당부가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