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철모 (46)-학군단 장교
녹슨 철모 (46)-학군단 장교
  • 시니어每日
  • 승인 2020.02.10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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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분창장이 심술을 계속 부려요?” 

유 소위가 물었다.

"아, 네! 그 친군 항상 그 모양이죠.”

"그럼 참모나 장님들이 가만 계세요?" 

그녀는 진정 걱정된다는 투로 묻는다.

“처음에는 공포심이 들더라고요. ‘혼자 약품을 다 팔아먹고 온다’, ‘무능한 군의관이다’ 등등의 소문이 나돌 때 이러다가 무슨 조그마한 약점이라도 잡히는 날엔 나는 남한산성에 가겠구나 하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어요. 더 힘든 건 내가 얼마나 견뎌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었어요. 현재도 자신이 없고요. 하지만 내친 김에 그냥 견뎌보는 거죠.”

“실장님은 은행나무예요.”

“은행나무라니?"

"그 나무는 내가 알기에 중세기부터 지금까지 수만 년 간 이 땅에 살아왔고 지금처럼 심한 공해의 도시에서도 아랑곳 않고 자신의 열매를 맺는 강인한 나무잖아요? 전 어쩐지 실장님을 생각하면 그 나무가 떠올라요.”

태원은 가슴이 울렁거렸다. 아무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생각에 늘 외로웠는데 그녀의 이 한마디가 그의 콧등을 시큰하게 해주었다.

“나도 선영씨 생각하면 떠오르는 나무가 있는데요.”

그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말았다. 그녀의 얼굴을 힐끗 보았으나 그녀는 자신의 바뀐 호칭은 듣지도 않은 듯한 표정을 하며 그녀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었다.

“난 무슨 나무예요?"

"능금나무 꽃.”

“능금나무? 왜 하필 사과나무 꽃이에요?”

그녀가 별 탐탁지 않은 투로 되물었다.

"왜 능금나무가 싫어요?"

"전 어릴 때 우리 집 과수원에서 봄이면 그 꽃을 적과하느라 무척 고생했어요. 그래서 그런지 그 꽃은 피다 만 것 같은 모양도 마음에 들지 않고...뭐 하여간 그런 등등의 이유로 그리 마음에 드는 꽃은 아니에요.”

"그래요? 그리 말하니 또 그러네요. 그 화려하다는 벚꽃이나 화사한 개나리꽃도 가까이에서 낱낱의 꽃을 들여다보면 그저 평범하고 아주 볼품이 없어요. 하지만 멀리서 그 꽃들이 무리를 지어 나무에 피어 있으면 우리한테 감동을 주죠. 난 가끔 우리 할머니 과수원에 가서 탱자나무꽃과 능금꽃이 하얗게 떼 지어 피어 있는 모습을 보면 마치 엄마의 품속에 안긴 아기의 기분이었어요. 또 눈을 뜨고 꿈꾸고 있는 그런 환상에 사로잡히곤 했지요. 그 향기도 요란하지 않고 은은한 게 또한 매력이죠.”

“아마 제 생각에는 분창장도 언젠가 실장님에게 굽히고 들어올 거예요.”

그녀가 화제를 바꾸었다.

"전번에 말했잖아요. 감찰부에서 의무대에 왔다 갔다고요. 나는 첫눈에 실장님에게 믿음이 갔어요. 이제 군단 참모들도 차츰 실장님을 바로 볼 날이 올 거예요. 그때까지 제가 실장님의 힘이 되어 드릴게요.”

그날 서로가 은행나무니 능금이니 하고 평소의 화제와 다른 이야기가 오가고 헤어지니 다른 날과는 또 다른 마음의 앙금이 쌓이는 것 같았다.

"다음에는 우리 밖에서 한 번 만나요."

태원은 이 말을 남기고 헤어졌다.

 

군인아파트 태원의 집에는 그 밤에도 학군단 출신 소위들이 모여들었다. 그들 중 누군가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트리오 로스 판초스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아마 ‘작박’(작은 박 소위)인 것 같았다. 잇달아 화음이 이어졌다. ‘큰박’(큰 박 소위)의 목소리였다. 둘이 이어가는 노래는 아무리 아마추어라지만 솜씨가 뛰어나 모두 조용히 열중해서 듣고 있었다.

분위기가 그들의 마음에 들었는지 앙코르 소리도 없는데 다음 곡이 이어졌다. 사이먼과 가펑클의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였다. 평소 이들이 오면 수줍어져 옆방이나 부엌으로 피하던 병주도 워낙 노래는 좋아해 슬그머니 이들 틈에 끼어 앉았다. 점점 노래 분위기가 무르익자 서림(남 소위)도 자발적으로 한 곡 불렀다. 김정호의 '검은 나비' 였다. 어느새 모두가 박수로 박자를 맞추었다. 젊은 장교들이 모여 노래를 부르니 매우 감동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태원은 영화 '카운트 포인트' 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2차 대전 중 유럽 전선의 미군을 위문 간 교향악단이 독일군에게 전부 포로가 된다. 이들이 나중에 독일군 앞에서 연주를 한다. 무섭게 생긴 장교들이 눈을 지그시 감고 ‘백조의 호수’ 전경을 듣고 있는 모습이 무척 감동적이었다. 오늘 이 자그마한 음악회에서 태원은 그 장면과 이 장면이 ‘겹치는’ 기쁨을 느꼈다.

"형수님도 한 곡 하세요. 노래 공짜로 듣고 마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소위들이 도망가는 병주를 억지로 끌어 앉혀 노래를 청했다. 휘파람을 불고 박수를 치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마지못해 병주가 노래를 불렀다. 은희의 ‘꽃반지 끼고’였다. 그녀는 긴장해서 좀 떨긴 했지만 그런대로 듣기에 무리가 없었다. 나중에는 태원에게도 노래를 부르라고 생떼를 썼지만 그는 이런 발라드풍의 노래를 전혀 해본 적이 없었으므로 끝까지 고집을 부려 노래를 하지 않았다.

“참 형님 포 사령부의 최동진 대위가 형님 고등학교 동기지요?”

갑자기 분위기가 바뀐다.

최동진은 태원의 고등학교 친구다. 졸업반 때 세 사람이 육사를 갔는데 그 중 이상문은 현역을 유지한 채 중앙정보부로 갔고 채천득은 유신 사무관으로 경찰로 전직했다. 그러나 최동진은 끝가지 육군에 남아 있었다.

“최대위가 군단장님 눈에 들어 전속부관으로 지명이 되었대요. 그런데 결혼을 한 사람이라고 탈락되었다는군요.”

그 친구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 군단의 예상된 작전계획은 북괴가 큰 남침은 못하고 언젠가 ‘ 서해 이북5도를 침범할 것이다.’는 것이다. 그리고 땅굴, 글라이더, 게릴라 등을 계속 서울로 보내 나라를 교란시킬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군단장이 단위부대장들에게 단기작전계획을 준비시켰는데 대부분 장군들이 지휘하는 부대인데 가장 작은 포병부대의 장인 대위 최동진이 제출한 준비물이 일등을 했다. 전 부대가 요란했다.

상금 오만원이 주어졌는데 최대위는 그 돈을 돼지를 사서 부대원들에게 선물했다. 이런 훌륭한 장교를 군단장이 그냥 두지 못했을 것이다. 두 사람은 부대가 따로 떨어져 있어 월요일 단위 대장 회의에 최동진 대위가 오면 잠깐 볼 정도였다. 그래도 그럴 수 없다고 어느 날 일부러 시간을 쪼개 점심으로 국수를 같이 먹은 적이 있다. 이 식사가 둘의 생의 마지막 점심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이런 분위기에서 갑자기 태원의 눈 앞에 하얗게 피어 있는 능금꽃이 보였다. 은은한 꽃향기마저 느껴졌다. 그는 애써 그 환영을 지우려고 고개를 크게 흔들어보았다. 잠깐 동안이었지만 그는 나쁜 짓하다 들킨 사람처럼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분위기를 병주가 좋아하니 태원도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여러 가지 생각이 겹치니 그의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소위들이 돌아간 자리를 치우고 둘은 잠자리에 드는데 부기로 얼굴이 부숭부숭하고 배가 꽤 불러 오른 그녀를 보니 왠지 태원은 눈물이 나왔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기분을 눈치 채지 못하게 “원수의 적을 향해 일어나 가자, 굳세인 우리 앞에 가랑잎이다” 라는 ‘보병의 노래’ 를 부르며 이부자리를 폈다.

 

출근을 하니 부군단장실에서 연락이 왔다. 지휘부로 올라가며 태원은 오늘도 오랫동안 시국 이야기로 시달리겠구나 하고 미리 각오를 단단히 했다. 별을 두 개나 단 사람에게 겨우 밥풀떼기 세 개 붙인 자신이 토론을 상대할 수도 없는데 얘기가 끝나면 그는 자신의 주장에 의견을 말하라고 재촉을 하니 정말 난감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짬짬이 태원도 자신의 주장을 조금씩은 펴본 적이 있다. 부군단장은 그러는 게 더 흥미로운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부군단장은 태원을 특별한 일이 없어도 자주 불렀다.

“멸공!”

그는 전방의 버릇대로 상급자를 보면 꼭 구호를 붙여 거수경례를 했다. 군단의 풍습대로라면 상급자 방에 들어갈 때는 목례만 한다. 부군단장은 베트남에서 사단장 근무를 마치고 다음 보직을 맡기 위해 지금은 귀국하여 대기 상태다. 화약 냄새가 아직 덜 빠진 그로서는 태원의 그 모습이 더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이거 육본에 주고 와.” \

태원은 이게 뭐냐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거 대구행 비행기 표인데 갈 때는 비행기 타고 올 때는 기차를 타고 와서 이 표가 남았어. 그래서 반납하는 거야.”

부군단장이 설명을 덧붙였다.

군대에서 '부'자 붙은 사람은 별 볼 일이 없다는 말이 꼭 맞는 말이다. 전방 사단장은 별 하나만 달아도 수행원이나 부하가 득실거리는데 부군단장은 주변에 아무도 없다. 그래서 말하자면 태원이 그 부관 역할을 자주 하게 되는 셈이다. 태원도 자신을 믿어주며 심부름을 보내는 사람이 고맙게 느껴졌다. 더구나 별 두 개의 지프를 타고 서울 나들이를 하노라면 비록 차의 ‘성판’은 가려져 있어도 모든 준장 이하 군인들이 차를 보고 경례를 하니 겨우 대위인 태원으로서는 정말 호사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