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철모 (48)-소유냐 존재냐?
녹슨 철모 (48)-소유냐 존재냐?
  • 시니어每日
  • 승인 2020.02.24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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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원 씨에게, 

바람이 많이 불고 있습니다. 어디로든 바람에 날아갔으면 하는 생각을 문득 해봅니다. 언제부터인가 난 나약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바람에게라도 기대고 싶은 이 나약함이 왜 생겼는지 당신은 알 것 같습니다. 당신도 나와 같은 생각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어요. 신은 왜 인간에게 이토록 다양한 감정을 소유하게 하였을까요? 한 사람만 평생 그리워하게 만들었다면 인간의 고통은 존재하지 않았을 거예요. 신의 잔인함은 바로 이런 것일 겁니다.

당신은 죽음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말했죠. 당신이 심각하게 그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난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곤 했습니다. 하지만 난 우리의 고통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표현이 있더군요. 삶 가운데 고통과 죽음의 장이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 죽음에서부터 삶에 이르는, 또 고통에서 황홀경에 이르는 전 범위를 담담히 지켜보는 것, 아무것도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없는 감정이지만 이것이 우리에게 선택되어진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사랑을 느낀 순간, 나의 고통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당신도 마찬가지겠지요. 당신과 나 사이에 희망이 있을까요? 아마 희망조차 헛된 꿈일 것입니다. 당신과 만나면서 남편을 속이는 즐거움을 이야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멍청한 생각이었는지 지금에야 깨닫습니다. 사랑이란 것이 누굴 속이면서 느끼는 단순한 쾌감이 아님을 이제는 알기 시작했습니다. 

거짓말이 인간을 얼마나 굴욕적으로 만드는지 당신은 알 것입니다.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참으로 힘든 언어입니다. 남편을 속이는 것이 이제 고통이 되어 나에게 돌아옵니다. 그러면서도 당신과의 만남을 기다리고 이렇게 몰래 편지를 쓰는 나 자신을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군요. 어쩌면 그건 당신이 살아있음이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되어버렸기 때문이겠죠.

미래는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동안 나는 당신을 통해 많은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색다른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거울처럼 항상 나를 비춰주고 있습니다. 당신의 열정적인 사랑이 때로는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당신과 만나면 내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당신의 유식함과 쾌활함이 나를 살아있게 합니다. 이 느낌이 없다면 나의 삶은 먼지와 같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죽음에 대한 말은 앞으로 다시 하지 말아주세요. 당신이 살아 있지 않는 세상은 꿈도 꿀 수 없습니다.

태원 씨,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화내지 말고 참고 끝까지 들어주세요. 이 선영이를 자유롭게 놓아주십시오. 이제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이쯤에서 우리의 만남이 중단되어야 전 태원 씨와의 좋은 추억만을 기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의 마음에 상처가 남지 않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 감정이 진행되면 저의 예감에 어쩐지 우리는 불행해질 것 같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저의 가슴도 무척 아픕니다. 그러나 나중에 죽음과 같은 고통보다는 지금의 아픔이 덜할 것 같습니다. 부디 마음을 진정하시고 각자의 보금자리로 돌아가도록 합시다. 언젠가 이런 불타는 감정이 조용히 가라앉으면 그땐 우리의 진정한 사랑을 느낄 수 있고 영원히 지속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의 만남은 단지 육체의 불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는 사랑이 진정 영원한 사랑일 것입니다. 당신을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그녀와의 첫 입맞춤의 달콤함을 되뇌이고 있던 태원에게 선영의 이런 청천벽력 같은 편지가 도착했다. 태원의 성질로는 지금 당장 병원으로 달려가 맘껏 두들겨 패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편 그녀가 틀린 말은 하지 않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생각은 그러하지만 그녀의 태도가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발을 동동 구르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참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른 시일 내 만나야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선영씨에게, 

난 도무지 당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군요. 아마 당신은 그날 나의 무례한 행동에 무척 실망하였나 보군요. 그날 일은 다시 사과할 게요. 그때 당신의 모습에 도저히 그냥 앉아 있을 수 없었어요. 하지만 앞으론 감정을 억제할 게요. 

내가 군단 생활에서 기죽지 않고 싸우며 견뎌내도록 힘이 되어 준 건 당신입니다. 난 그걸 사랑의 위대함이라고 생각했지요. 이제 겨우 적응되면서 앞으로 한 발자국씩 떼어나가려는 나에게 당신의 결정은 더 이상 나를 견딜 수 없게 만드는군요. 모쪼록 나의 소유욕을 줄이도록 노력할 게요. 도와주세요.”

 

태원은 편지를 쓰면서 무척 자존심이 상했다. 그녀 말대로 지금 깨끗이 헤어지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그건 죽음과도 같은 고통이다. 그는 다시 그녀의 마음을 돌려보기로 작정하였다.

병주가 친정으로 내려갔다. 이제 만삭이 되어 머지않아 출산이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태원은 난생 처음 자취를 하게 되었다. B.O.Q(독신장교숙소)에 있는 장교들 중에 자취하는 사람도 있고 매식하는 사람도 있었다. 대개 나이 든 장교들은 자취를 하고 젊은 장교들은 밥을 사 먹었다. 태원은 이런 기회가 아니면 자취해볼 일이 없다는 생각에 퇴근 때면 장에 들러 반찬거리를 사 왔다. 물론 병주가 마른반찬, 밑반찬은 해두고 갔기 때문에 주로 국거리와 찌개거리를 샀다. 

매일 밥을 사 먹던 학군단 소위들도 태원에게 와서 함께 밥을 지어 먹는 날이 많았다. 서로가 옛날 등산 가서 하던 솜씨라며 버너에 찌개를 끓이는데 그들의 말과는 달리 맛은 그때그때 다 달랐다. 찌개는 정말 등산 갔을 때처럼 그런 식으로 하면 대충 먹을 만하게 되는데 가장 어려운 것은 된장을 풀어 콩나물이나 시금치국을 끓이는 것이었다. 된장 양을 못 맞추니 어떨 때는 너무 짜고 어떨 때는 너무 싱거워 먹기 거북했다. 그러나 그마나도 바쁜 아침이나 배고픈 저녁에는 유용하게 먹을 수가 있었다. 그냥 끓여서 밥을 말아 먹으면 되니 말이다. 살이 찌기도 하고 붓기도 하여 옛날의 매력을 잃기는 하여도 막상 병주가 없으니 그녀의 생각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하지만 전방 시절과 다른 것은 병주 외에 또 한 여자 선영이 생각도 떠오르는 것이 그때와의 차이였다.

 

태원이 병원에서 선영을 만났다. 의외로 그녀는 그렇게 강경하지 않았다. 병원의 매점에서 만난 탓인지는 몰라도 겉으로는 담담한 모습으로 이야기를 하였다. 그녀가 정말 그 편지를 보낸 게 맞는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그녀는 태연하였다. 하긴 여러 사람이 보는 곳에서 둘은 그들의 감정을 자제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태원은 생각하였다. 최소한 남들이 보고 있을 때 그들의 감정은 아주 평온한 듯 보였다. 그것은 선영에 대한 감정을 자제해야 되고 또 육체적 접촉이 불가능한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하면 두 사람이 이런 제한된 감정만 계속 유지할 수 있다면 영원히 그들의 아름다운 관계를 지속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이 보고 있으니 둘은 다시 높임말로 아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유 소위님, 많이 바쁘시죠?"

“오랜만이네요. 전 늘 그렇죠. 실장님이야말로 바쁘시죠?"

그녀가 쉽게 말하니 마음이 가벼웠다. 지금 껴안을 수도 없고 반말도 쓰지 못하는 분위기가 되니 둘은 오히려 감정 교류가 쉽고 기분이 더 좋았다.

“전에 많이 놀랐어요?" 

다시 그때의 감정을 떠올리며 물었다.

“아니.......” 

유 소위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럼?"

“실장님, 바쁘지 않으세요?"  

말을 마치자는 듯이 그녀가 일어섰다. 태원이 문을 나서자 그녀는 등 뒤에 대고 툭 말을 던졌다.

“나는 태원씨가 좋아.” 

낮은 소리로 말하고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응급실로 뛰어갔다.

태원은 정신이 복잡해졌다. 편지와 오늘의 말을 어떻게 연결해야 할까? 하여간 지금 당장 관계가 끊어지지는 않겠다는 안도의 숨을 쉬며 태원은 정신과장 방으로 갔다.

“너 요즘 얼굴 좋은데 연애하니?" 

내가 물었다.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니, 형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하는 거요? 안 그래도 군대 생활 고달파 죽겠는데.”

“소문 들으니 넌 이제 편안해졌더군. 막강한 권력들이 네 배경이 되었다던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

“부군단장이 너를 좋아하고 게다가 헌병대장과 보안대장이 너 칭찬하는 걸 내가 병원장 방에서 들었어.”

“그러면 뭘 해요. 참모들이 가만 있어줘야지요.”

"아니야. 어느 집단이든 윗사람이 총애하면 아랫것들은 저절로 따라가게 되어 있어.”

“하긴 그렇게 말하니 분위기가 전보다는 나은 것도 같아요. 하지만.......”

"하지만 뭔데? 또 딴 고민이 생겼어?" 

나는 다시 물었다.

"아니 꼭 뭐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그는 말의 꼬리를 잘랐다.

“형, 군대는 사병들이 중요해요. 그들이 편하고 사기가 올라야 부대가 잘 돼요. 막말로 저는 장군들이나 참모들이 저를 두들겨 패 죽여도 좋아요. 하지만 병들에게는 고마운 사람으로 살고 싶어요." 

그는 평소 그의 주장을 다시 한번 되뇌며 이야기의 본질을 애써 돌려 버렸다.

"그러려면 네가 먼저 안정이 되고 편안해야지. 안 그래?"

"형, 그게 정말 그래요. 그런데 그게 안 돼요. 아름다움이 나를 괴롭히는군요.”

"인마! 아름다움은 우리를 즐겁게 하지 괴롭히긴 왜 괴롭힌다는 거야?"

“에이, 형도 잘 아시면서 모든 비극은 아름다움에서 생겨나는 거잖아요.”

“야! 그건 아름다움의 탓이 아니고 그 이름다움을 가지려고 하는 데서 오는 고통이야. 우리가 아름다움을 소유할 생각을 하지 않으면, 존재로서 그냥 인정하면 슬픔이 올 리가 없지.” 

내가 말하면서도 뭔가 확신이 가지를 않았다.

"그 말이 맞아요. 하지만 권력이나 돈이나 아름다움이나 그걸 두고 음미하며 즐길 수 있는 인간은 이미 도가 통한 사람이 아닐까? 우리 같은 무지렁이는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그래서 행복감을 느끼는 거 아닌가요?"

“그건 그래. 이론상으론 소유의 삶보다 존재의 삶을 살라고 하지. 특히 ‘설리반’ 같은 학자는 말이지. 우리 동양에서도 ‘무소유’라고 하잖아? 하긴 나도 말대로 안 돼. 하지만 우리 인간이 진정한 행복을 위해 가야 할 길은 그것인 게 확실해.”

"에이, 형이나 잘 해 보슈.” 

태원은 나의 강의 같은 말을 더 듣기 싫다는 태도로 방을 나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