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숙의 ‘이명’
자정이 넘어 문단속을 마치고 자리에 눕는다
고요를 밟고
귓속의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 소리
가깝게 들렸다 멀어지는 소리로 흐르는 길
돌아가는 것은 다 전원을 꺼버렸는데
귀는 쉼 없이 소리를 재생한다
어떤 소리에도 나는 귀를 열고 싶지 않은데
문득, 고막을 찢듯 다가오는 굉음이
저벅저벅 귓속에서 걸어 나온다.
젊은 시숙을 부평 화장터로 들여보냈던
문밖에서 울어대는 조카 셋을 품에 안았던
그날부터였나
내 몸에 집을 짓고 사는지
때론, 불청객으로 뛰쳐나와 삼 일 밤낮을
양철지붕에 빗방울 떨어지듯
딱따구리 나무 속을 파 내려가듯
달팽이관을 두드리고 찌르는 통증
머리칼을 바늘처럼 세우고 턱관절을 깁는다.
이승을 빠져나가지 못한 영혼의 옷자락 소리
강약 조절 센서의 엉킨 회로처럼
끝없이 되감기고 풀리는 소리의 메아리
귀를 손가락 끝으로 막으면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 소리 희미해진다
귀는
소리의 풍요 속에 고요의 빈혈을 앓고 있다
시집 “엄마들이 쑥쑥 자라난다” 한국문연. 2012. 10. 30.
느닷없이 귀에서 한겨울인데 매미가 울고 봄날에 귀뚜라미가 울었다. 울고 싶은데 울 데가 마땅찮을 때 얼마나 난감하던가. 이해 못할 일이 아니었다. 반갑잖은 손님일망정 기꺼이 귀를 빌려주기로 했다. 그런데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더니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를 내고 있다. 기계음은 거슬림을 넘어 불쾌감을 주다가 불편함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결국 남편과 이비인후과에 갔다. 나는 양쪽이, 남편은 한쪽이 이명증이란 진단이었다. 부부가 같이 앓는 게 다행이라는데 위로로 들리진 않았다. 귀 모형을 놓고 자상한 설명을 길게 하는데도 무슨 말인지 어려웠다. 소음에 덜 노출되는 수밖에 없다는 처방을 귀에 담아서 돌아왔다.
‘귓속의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은 꼭 잠자리에 들었을 때 더 맹렬해진다. 일상에 묻혀 바쁘게 움직이는 낮 동안은 녀석의 존재감이 상실되기 마련이다. ‘돌아가는 것은 다 전원을 꺼버렸는데’도 불구하고 주파수가 맞지 않은 라디오를 켜놓은 것 같은 소음이 못살게 군다. ‘문밖에서 울어대는 조카 셋을 품에 안았던 그날부터였나’ 시인은 나름의 발병 시기를 유추해본다. ‘달팽이관을 두드리고 찌르는 통증’에 시달리면서도 훌륭한 치료법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이승을 빠져나가지 못한 영혼의 옷자락 소리’, 멋진 청각적 이미지마저 아프다. ‘귀를 손가락 끝으로 막으면’, ‘소리의 풍요 속에 고요의 빈혈’이 동병상련으로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