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들이 팔공산에서 가장 강한 기운을 느낀다는 소년대(少年臺) 바위 위에 늙지않는 소나무,
지역민들에게 소나무의 벽사력(僻邪力)으로 심신 정화 및 정기가 스미기를
높이 579m 인봉 정상에 높이 2m 고색창연한 소나무 한그루의 고고한 자태,
조선후기 성리학자 열암 하시찬의 『공산팔영』중 제1영으로 소개한 『소년대(少年臺)』의 신선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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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는 절개를 상징하는 면도 있지만 동시에 잡신을 물리치고 장수를 비는 뜻도 있었다.
솔잎을 문 앞에 뿌리는 침벽(針辟) 의식은 솔잎의 뾰쪽한 끝으로 침을 놓아 벌레를 멀리 쫓아 버린다는 예방의 의미가 있었다. 서낭당을 지날 때는 소나무 가지나 돌을 놓으면 길하다고 했고, 가뭄이 심할 때 병에 소나무를 꽂아 문 앞에 두면 비가 내린다고 했다.
소나무는 제의(祭儀)나 의례 때 부정을 물리치는 신물로서 제의 공간을 청정하게 하는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 마을 동제를 지내기 며칠 전부터 도가집, 공동우물, 마을 어귀 등에 새끼를 왼쪽으로 꼬아 만든 줄에 소나무 가지를 꿰어서 걸어 놓는 것은, 밖에서 들어오는 잡귀의 침입을 막아 제의 공간을 정화하기 위해서였다.
집안에 잡귀와 부정을 막기 위해서 정월 대보름 전후해서 소나무 가지를 문 앞에 세우거나 지붕이나처마에 꽂기도 했다
묘 주변에는 소나무를 심어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묘 주변에 도래솔을 심는 것은 주변 환경을 고려한 점도 있겠지만, 저승에서 지내는 영혼의 명복을 빌고 이승의 일에 관심을 갖지 말아달라는 기원을 담은 것이다. 도래솔은 정화와 벽사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소나무와 어울려 살며 소나무는 우리의 민속문화로 자리잡았다.
소나무 벽사력으로 슬기롭게 난관을 헤쳐 나간 지혜를 새긴다. 소나무의 청아한 기운이 스민다.
공산기적석대류(公山奇蹟石臺留) 공산의 기이한 자취 석대가 남아
겁우남풍열기추(劫雨藍風閱幾秋) 비바람을 겪으면서 몇 년이나 지났던가
선자식송송기로(仙子植松松己老) 신선이 소나무를 심었는데 이미 늙었고
가명유속소년유(佳名惟屬少年遊) 아름다운 이름만 소년의 노님에 붙였네.
'소년대(少年臺)'라는 제목으로 쓰인 이 시는 조선 후기 성리학자이자 대구 출신인 열암(悅庵) 하시찬(夏時贊 1750~1828) 선생이 경관이 특히 빼어난 팔공산의 여덟 곳을 읊은 '공산팔영' 중 하나로, '열암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이 문집에서 '공산팔영'은 소년대(少年臺)ㆍ방은교(訪隱橋)ㆍ동화사(桐華寺)ㆍ염불암(念佛庵)ㆍ일인석(一人石)ㆍ·삼성암(三省庵)ㆍ·선인대(仙人臺)ㆍ·용문동(龍門洞)으로 이중에서 소년대(少年臺)를 제일 먼저 소개하고 있다. 이 시 내용을 보면 소년대라는 명칭의 석대 위에는 신선이 심은 소나무가 자라는데 이미 늙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과거 소년대로 불리기도 한 이 석대는 지금은 팔공산 인봉으로 불려지고 있다.
인봉 가는 길은 먼저 도학2동 삼거리(방짜유기박물관입구)→ 시인의 길 → 돌집마당 → 방짜유기박물관 → 북지장사로 이어지는 팔공산 올레길 1코스를 이용하는데, 거리는 왕복 5㎞ 이며 1시간 30분에서 2시간 정도의 거리이다.
대부분의 탐방객들은 자동차를 이용하여 도학2동 삼거리에서 1㎞ 정도를 가다보면 국가정보자원관리원 공사현장이 나타난다. 이곳 도로양쪽 주변 공터에 차를 세우고 나서, 앞을 보면 도로 우측에 북지장사 자연표지석이 있는 삼거리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좌회전을 하고 나서 다시 정면을 보면 솔숲 입구가 나타난다.
여기서 북지장사에 이르는 약 1.5㎞ 구간은 마치 소나무 박물관이나 전시장을 연상할 정도로 울창하게 우거져 있는 소나무숲이 하천변을 따라 북지장사 사찰까지 멋지게 조성되어 있어 삼림욕을 하기에는 팔공산에서 으뜸이다.
울창한 솔숲과 바닥에 깔린 갈비(솔가리)에서 풍기는 향긋한 솔향기 길도 좋지만 시냇물 소리를 따라 북지장사에 이르는 산소를 머금은 물소리길도 더할 나위없이 좋다. 향기와 소리에 취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어느새 북지장사 경내에 다다른다.
북지장사 주차장에 이르러 야외화장실 옆에 있는 초입로를 따라 북서쪽 능선으로 나 있는 나무계단을 한 발자국씩 올라가다 보면 숨이 헐떡거리기 시작한다. 코가 땅에 닿을 듯하게 급경사 등산로를 따라 0.54㎞를 오른다. 15~20분 정도 오르다 보면 소나무숲 사이로 커다란 바위가 눈 앞에서 반긴다. 이 바위 봉우리는 남동쪽 북지장사 방향에선 높이가 2층 남짓이고, 서쪽 동화사 방향에선 대략 4~5층 건물 높이로, 팔공산 주능선의 891m 노적봉에서 뻗어 내린 능선 위에 솟아있다.
옛 선현들은 이 봉우리를 소년대(少年臺)대라 불렀는데 579m에 불과한 그리 높지 않은 봉우리지만, 수억 년 팔공산의 정기와 기상을 듬뿍 받고 있다. 이 바위 봉우리를 오르면 소년대 꼭대기는 사람 수십 명이 올라서도 될 정도로 넓고 평평하다. 여기에는 높이 2m 남짓한 나이를 알 수 없는 고색창연한 소나무 한 그루가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 소나무는 갈라진 바위 틈새에 깊이 뿌리를 내려 두 갈래로 갈라져 있다. 굵은 가지는 둘레가 60㎝, 가는 가지는 둘레가 50㎝로 마치 팔공산이 오랜 세월 정성을 다해 다듬은 분재(盆栽)처럼 고고하고 단아해 보인다. 삼매에 든 수도승 같이 굳게 입을 다문채 기나긴 인고의 세월을 지키고 있는 듯하다. 소년대 소나무의 늠름한 자태는 탈속한 도인, 고결한 선비의 기상을 닮았다.
팔공산은 백두산에서부터 시작된 산줄기가 낙동정맥에서 내륙으로 흘러내려 대구경북을 향해 마지막 힘을 모아 솟은 산이다. 그 만큼 기운이 강해선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김유신이 이 산에서 기도해서 삼국을 통일했다고 기록해 놓았고,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이 산을 불의 산이라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팔공산에서 가장 강한 기운을 느낄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옛 사람들은 소년대를 즐겨 손꼽았고 그 중에서도 소년대 바위 위에 용틀임하고 있는 늙지 않는 소나무로 여겼다.
선인들의 기록 가운데 270여 년 전, 퇴계 이황의 학맥을 이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ㆍ1711~1781) 선생은 1748년(영조 24년)에 팔공산을 유람하고 남긴 남유록(南遊錄)에서 이곳을 감명깊게 묘사했다. “ 몇리를 들어가니 소년대(少年臺)라는 곳이 있었다. 큰 바위에 올라서니 시내가 굽어보이고, 그 위에는 오래된 소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고색창연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入數里得所謂少年 臺者巨石臨溪而 有松生其上枯其一半蒼古可愛》”고 했다.
소년대 위 이 소나무의 나이는 얼마나 되었을까? 이상정이 270여 년 전에 이미 이 나무를 고색창연하다고 하였으니 지금의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홍종흠 매일신문 (전)논설주간 겸 팔공산 문화포럼 고문에 의하면 ˝소년대란 명칭은 1918년 조선총독부가 만든 지도에는 579m봉우리를 소년대가 아닌 노족봉(老足峰)으로 표기하였다. 이는 소년대가 ‘장로인 천왕봉을 소년이 시봉한다’ 는 뜻에서 소년대와 같은 의미로 볼 수도 있다. 노족봉(老足峰)은 ‘천왕봉인 장로(長老)’ 와 소년같이 손아래 사람을 뜻하는 족하(足下)에서 그 이름을 따온 것으로 생각된다.”고 했다.
소년대 정상에는 앙증맞게 생긴 인봉 정상석이 있는데 이 표지석은 한국지명총람(1978)에서 노적봉을 인봉으로 잘못 표기해서 바로잡기 위하여 2015년 2월 22일 일사산악회에서 설치하였다고 한다.
우리 선조들은 곡우(穀雨)때에 씨나락을 그릇에 담고 솔가지를 그 위에 덮어 놓는다. 그것은 궂은 일이 있는 남의집에 다녀오는 사람이 혹시나 묻혀 올지도 모를 잡귀나 부정의 침입을 막아 소중한 씨나락을 잘 보존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이다. 인봉 정상에 올라 명품소나무를 바라보면서 벽사력과 정신적인 청정함을 일깨우고 남의 집에서 묻혀 온 우한발 코로나바이러스가 하루 빨리 물러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조상들의 민속염원이 담긴 솔가지 하나를 마음에 담아 우리 아파트 현관 위에 올려 놓는다 코로나 재앙이 사라지기를 간절히 염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