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은 대강의 상황을 알고 있지만 선영의 생각이 항상 변하고 있으므로 무어라고 충고해야 할지 얼른 적당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그녀로서는 커다란 문제에 부딪혀 있기 때문에 그런 거겠지만 항상 시원시원한 선영이 이번에 보여주는 모습을 보면 너무 실망스럽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처음 이춘은 선영이 유부녀지만 태원과 친구처럼 만나는 듯하여 관여하지 않았다. 서로 다른 성장 과정이면서도 이상하게 이상과 철학이 비슷한 것도 재미가 있었고 삭막한 군대에서 나름대로 이상향을 추구하는 듯한 군단 의무실장이 이춘에게도 호감을 주었다. 의사이면서도 군인 같은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군부독재를 욕하면서도 또한 군대를 사랑하는 그 모습에도 호감이 갔다.
남녀 만남의 끝은 어디일까? 이춘은 그래서 이 둘의 진행이 궁금하고 흥미로웠다. 그러나 난관이 생기면서 태원은 모르겠지만 선영의 행동은 너무도 갈팡질팡하는 듯 보였다. 아주 이기적인 계산을 하는가 하면 때로는 소설 속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난 말이야. 아무래도 이혼은 할 수 없을 것 같애.”
"그럼 간단하네. 이 참에 모든 걸 중단하면 되잖아?“
“하지만 난 그와 약속을 했거든. 같은 부대로 전출을 가겠다고....”
"야! 그게 말이 되는 이야기야? 니네들이 좋아서 같이 가자는 거였잖아. 그런데 넌 지금 모든 걸 청산하겠다고 말하고 있잖아?"
"그게 사실 말이지, 내가 실장이 싫어서 이렇게 된 건 아니잖아? 내가 전에 깨끗이 갈라서자고 말했을 때 그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어. 내 평생 그토록 슬픈 얼굴은 처음 보았어. 너 보기에 내가 변덕쟁이로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렇게 한 번 생각해봐. 내가 남편의 감정을 가라앉히고 나는 우리 집의 평화를 위한다고 그런 결심을 했지만 그건 나의 일방적인, 다시 말하면 나만 편하고자 하는 시도였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야. 나는 어차피 불장난 하자고 그 사람을 만났던 것은 아니거든. 우리는 만나면 서로 편했어. 나는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 같았어. 그도 그 안에서 우리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었고, 남편에게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테두리 내에서 나는 관계를 계속하고 싶다는 이야기지.”
"야! 남녀가 만나면 손잡게 되고 입맞춤으로 이어지기 마련인데, 네 말은 흔히들 말하는 플라토닉 러브라는 거야? 내 생각에는 남자들이란 소유의 동물이기 때문에 너처럼 그런 철학은 억지로 갖다 붙인 소리로 들려.”
“사실 우리 남편은 평생을 직업군인으로 가야 되지 않니? 난 그건 이미 각오했지만 정작 같이 살아보니 그 사람은 너무 진급이나 출세에만 온 정신을 쏟고 있는 거야. 나보다는 진급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 같더라고. 그는 항상 입으론 날 사랑한다고 하지만 가끔 그것은 나의 육체를 말하는 것이라는 의심도 들더라고. 그래 남녀의 사랑이란 결국 네 말대로 육체의 결합으로 완성되는 거겠지. 춘아! 우리가 쉽게 일반적인 경우를 우리 자신에게 대입하여 나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미리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차라리 우리 남편이 나의 정신적인 외출을 용인해준다면 그와 나는 오히려 행복한 부부가 될 것도 같아.”
"난 니가 하도 황당한 소리를 하니까 머릿속이 꼬여 점점 이해가 힘들어져. 그래 모든 게 니 말이 맞다 치더라도 넌 앞으로 굉장한 고통과 번민을 겪어야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하긴 둘이 무슨 결론을 내자고 시작한 얘기는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라도 속을 털어놓고 나면 마음이 좀 가벼워지리라는 생각에 시작한 것이었는데, 선영이나 춘의 가슴은 오히려 납덩이처럼 더 무거워진 상태로 밤 근무에 들어갈 채비를 하였다.
“멸공! 군단의무실 우 대위입니다. 부관님, 그동안 잘 계셨습니까?"
태원이 드디어 결심을 하고 영천 삼사관학교장 황 중장의 부관에게 전화를 했다.
“그 동안 부대 볼 일이 바빠서 그동안 연락을 못 드렸는데요. 저도 삼사로 가겠습니다.”
이 소리를 듣자 그쪽 부관의 목소리가 울린다.
"이봐, 군의관 당신이 뭘 잘 모르나 본데. 우리 황 장군은 대통령 각하가 총애하는 분이야. 당신도 알다시피 그 어른은 베트남전에서 맹호부대를 이끈 역전의 용사시잖아. 그런 분이 전무후무하게 군의관을 필수요원으로 지적했다는 것은 당신에게는 이보다 더 큰 영광은 없어. 대한민국 역사상 군의관을 수행요원으로 천거한 건 처음 있는 일이야. 물론 당신이 잘해서 그렇겠지만 그동안 생각할 시간 운운한 것도 큰 결례를 한 거야. 하여간 잘 됐수다.”
"그런데 부관님, 청이 하나 있는데요.”
“그건 뭐요?"
"제가 그쪽에 가면 의무실 근무를 하게 되지 않습니까? 여기 군단 야전 병원에 아주 뛰어난 간호장교가 하나 있습니다. 전 이 친구도 함께 갔으면 하는데요.”
“뭐? 그런 좋은 간호장교가 있다고? 혹시 그 사람 당신 애인 아냐? 그건 그렇고 당신이 추천한다면 그렇게 해야지. 좋은 인재는 좋은 자리에 있어야 잘 크는 거요. 인적사항을 불러 보슈. 내가 당신하고 같이 발령을 내도록 할게.”
전화를 마치고 나자 태원의 마음은 오랜만에 가뿐하고 속이 후련하였다. 선영의 남편이라도 남들이 아무 말만 하지 않으면 둘이 같은 부대로 전속한다는 사실을 알 턱이 없을 것이다. 다만 선영의 진정한 속셈을 모르므로 태원의 마음 한 켠이 납덩이같은 무게를 느끼고 있었다.
군단 2호차에 소위들과 태원이 꼭 끼어 타고 의정부로 달리고 있었다. 한미 1군단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 중에 태원의 계급이 가장 선임이므로 앞자리에 탑승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1호차도 몇 번 타 보고 헌병대장이나 보안대장의 쿠션 좋은 지프도 자주 타 봐서 그저 그런 기분이건만 소위들은 그렇지 않는 모양이었다. 차의 쿠션도 보통 지프와 달라 승차감이 좋았지만 비록 별판을 가렸어도 장군 차이므로 검문소 헌병들의 요란한 경례 구호에 그들의 기분 또한 즐거웠다. 평소에 버스를 타고 부대지역을 벗어나려면 소위쯤은 군단 헌병들이 우습게 보고 사병처럼 신분증을 보자느니, 외출증을 보자느니 하며 제멋대로 갖고 놀곤 하였다. 그들이 차를 바꿔 타니까 달라지는 대접에 스스로들 놀란 모양이었다. 2호 차를 부대로 돌려보내기 전에 운전병을 장교식당으로 데려가 미제 콜라를 한 병 사 주었다. 이 광경을 보고 어느 틈엔가 미군 하나가 뛰어와 정색을 하고 이를 제지했다. 사병은 장교식당의 어떤 것이라도 주면 안 된다는 것이다. 태원 일행은 머쓱했다. 하지만 그들의 규칙이 그렇다는 데는 할 말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운전병을 데리고 하사관 식당에 가서 음료수를 사 주고 보냈다. 태원 일행이 장교 클럽으로 들어가는데 난데없이 종소리가 난다. 이건 또 무슨 풍습인가? 하고 일행이 어리둥절해 있는데 이 소위가 달려와 웃으며 말했다.
“박 소위 때문이야. 군인은 실내에선 모자를 벗게 되어 있잖아? 박 소위가 모자를 안 벗고 들어왔기 때문이야. 우리 교범에도 그렇게 되어 있다고, 우리가 안 지켜서 그렇지. 여기선 그걸 꼭 지킨다고요. 이 클럽에선 여자들이 외투를 벗지 않고 입장하거나 규정위반한 남자가 오면 아무나 그걸 본 사람이 종을 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규정위반자는 카운터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청하는 음식 값을 대신 내주게 되어 있어. 보통 전부는 아니고 몇몇 사람들이 음료수나 칵테일 한 잔 정도 시키고 서로 웃고 그런다고요.”
태원 일행은 초보라고 미군들이 웃고 그냥 보내주었다. 일단 식사부터 하는데 정말 산해진미였다. 소위 바이킹 혹은 뷔페식이라고 하는데 온갖 기름지고 향기로운 음식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장교들은 제 맘대로 그것들을 접시에 담아와 먹고 있었다. 이름 모를 양주도 주문해서 먹는데, 다행인 것은 주문 받는 종업원은 전부 한국인이어서 상대하기가 쉬웠다. 태원은 어릴 적 생각이 났다. 6·25 때 미군 부대에서 나온 꿀꿀이죽에서 나던 그 향기롭고 기름진 냄새를 여기서 다시 맡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리고 지금은 돼지 죽통이 아닌 오리지널 음식을 보고 먹는 것이다. 그에게는 오랜만에 맡아 보는 고향의 냄새였다. 황홀한 기분은 꼭 술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슬픈 생각도 떨칠 수가 없었다. 배고픈 어린 시절도 연상되었고 현재 우리 장교식당과도 비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태원에게 미국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늘 동경과 미움을 함께 느끼게 하는 그런 나라였다.
이윽고 나체쇼가 시작되려고 했다. 요란한 박수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터졌다. 그런데 사람들의 시선이 무대 쪽이 아니고 클럽 입구 쪽을 향하고 있었다. 이 소위가 태원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가 가리키는 쪽을 보니 웬 백바지를 입은 훤칠한 키의 신사가 클럽으로 들어와 서 있었다.
“저 양반이 바로 홀링스 워스 중장이에요. 한미1군단장 말이에요.”
“그런데 왜 저기 저렇게 서 있어?"
태원이 이상하게 생각하며 물었다.
“자리가 없기 때문이죠.”
"뭐 자리가 없다고?"
태원은 이해가 되지 않는 소리였다. 이 부대의 대장이 왔는데 아무도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니 말이다.
"여긴 예약하지 않고 오면 저렇게 서서 봐요. 누구든지 그렇게 해요. 보시다시피.”
"그런데 박수는 왜 치는 거야? 자리도 양보 안 하면서 말야.”
"형, 그건 말이죠. 장군식당은 따로 있잖아요. 저 양반은 거기서 식사를 하니 사실 여긴 잘 오질 않아요. 하지만 가끔 들르죠.”
"훌렁쇼 할 때?“
"아이, 형님도 그게 아니고요. 오늘은 어떻게 그렇게 되었네요.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회식 같은 거죠.”
“뭐 회식이라고?”
"그래요. 얘네는 우리 같은 그런 식의 회식은 없어요. 이렇게 흥겹게 많은 장교들이 모였을 때 예고 없이 오면 그땐 저 양반이 음식값을 내어주러 오는 거죠.”
"그래. 자기가 부하들에게 한 턱 쏜다는 말이군.”
“그렇죠. 그러니까 모두가 반갑다고, 고맙다고 저렇게 박수치고 휘파람을 부는 거예요.”
태원은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군단 생각이 났다. 이발소에 가면 빨간 별표가 붙어 있을 때가 있다. 그건 장군이 이발 중이라는 표시였다. 군단장일 때는 별 세 개, 부군단장은 두 개, 참모장은 한 개, 이런 표시가 있으면 장교들은 모두 돌아가는 게 일상이었다. 한 번은 태원이 면도를 하던 중에 얼굴의 반을 하고 반대쪽 반을 시작하는데 부관이 왔다. 전부 나가 달라는 것이었다. 옆의 장교식당에는 이발하다 쫓겨난 장교들이 서로를 쳐다보고 웃고 있었다. 머리칼을 자르다 온 사람, 머리를 감다가 온 사람, 면도를 하다 온 사람, 가지가지의 모습들이었다.
"한미군단장은 청와대에도 권총 차고 들어갈 수 있대요. 우리 군단장하고는 같은 별 세 개라도 천양지차지요. 우린 참모총장이라도 그렇겐 못 하잖아요?”
홀링스 워스의 하얀 바지 뒷주머니에는 예쁜 별 세 개가 수놓아져 있었다. 그 외에는 장군이란 아무 표시도 없었다. 군단장은 서 있고 드디어 쇼걸이 나타났다. 옷을 잔뜩 걸쳐 입은 채로. 모두 미친 듯이 박수를 치고 휘파람을 불었다. 음악에 맞춰 그녀의 옷이 하나씩 객석으로 던져지고 있었다. 성질 급한 한국 장교들은 이제 그만하고 홀랑 벗었으면 하는데 그녀는 사내들의 애간장을 다 녹일 작정인지 아직 브래지어도 벗지 않고 느릿느릿한 춤만 추고 있었다.
쇼걸은 게슴츠레 풀린 눈으로 객석으로 내려왔다. 미군 장교들의 함성과 박수가 우레와 같이 터져 나왔다. 이윽고 나이 지긋한 민간인 차림의 미국인 한 사람을 무대로 데리고 올라갔다. 그녀는 손짓으로 자기의 몸짓을 따르라는 제스처를 하고 있었다. 미국인들은 재미있다고 웃고 즐기고 한국 장교들은 짜증만 냈다. 빨리 벗지 않고 뭘 해? 하는 불만 가득 찬 얼굴들을 하고 앉아 있었다.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하다 보니 어느새 그 사나이도 반라가 되었다. 그의 목에는 반짝이는 인식표(군번줄)가 달려 있었다. 태원은 깜짝 놀랐다. 이 사내는 대령이라고 했다. 민사참모라고 하니 이 부대에서는 높은 직책의 장교다. 그런 노병도 아직 군번줄을 걸고 다니다니. 더구나 일과가 끝난 밤인데도 말이다. 태원은 그의 인식표가 없었다. 전방에서 겨울에 세수하느라 벗어 놓은 뒤 추워서 급히 방에 들어오면서 잃어버린 것이다. 그 스스로 육군교범대로 산다면서도 그 모양인데 저 미국 대령은 사복 속에도 군번줄이 걸려 있다는 사실이 태원의 얼굴을 화끈거리게 했다.
그 대령은 차마 군번줄을 매단 채로는 쇼하기가 멋쩍었는지 자신의 군번줄을 벗어 동료에게 던져 주었다. 이 행동 또한 태원에게 감동을 주었다. 쇼는 쇼이고 군인은 군인이라는 표시로 느껴졌다. 마지막에 그녀가 팬티를 벗어 객석으로 던질 무렵에는 그 대령도 상반신은 나체가 되어 있었고 아래는 팬티만 입고 있었다. 그녀가 대령에게 다가갔다. 그 게슴츠레한 눈으로 남자를 쳐다보며 그녀의 아랫도리를 그 남자에게 갖다 대고 부비기 시작하였다. 대령은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엉덩이를 뒤로 뺐다. 박수와 웃음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불이 꺼져 버렸다. 캄캄한 장내에선 여름철 논 개구리 소리 같은 소음이 요란하였다. 다시 불이 켜졌을 때는 무녀도 대령도 중장도 다 사라지고 없었다. 태원 일행은 버스로 돌아오면서 말이 없었다. 그것은 부러움과 시샘, 황홀과 불쾌감 이런 정반대되는 두 개의 감정이 서로 엉겨 그에 따른 생각들이 복잡해졌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