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씨는 봉사 일념으로 행복했다
한 주간 내내 대구 금호강 북쪽 방천길은 벚꽃과 벚꽃을 보러온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아양기찻길’ 건너 서쪽 벚꽃길은 벚꽃 터널이 공항교까지 계속돼서, 폭 5m 정도의 길은 오가는 많은 사람들로 동성로 거리를 방불케 했다.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젊은이들이 도심지보다는 가까운 강변을 택한 까닭으로 보였다. 벚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청춘은 꽃보다 예뻤다. 비록 모두가 마스크를 꼈지만.
사람들이 많이 다니기는 둑 아래 걷기운동과 자전거 타기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길에도 마찬가지였다. 춘분 지나면서 한결 햇볕이 제법 강해졌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았다. 길을 따라 동쪽으로 나아가면 아양교 밑을 지나고, 동대구톨게이트 부근에서 범안대교 길과 혁신도시 가는 길로 갈라진다.
길에서 강물까지는 시멘트블록으로 쌓은 비탈 제방(堤防)인데 곳곳에 계단으로 내려갈 수 있게 돼 있다. 열여섯 계단이다. 계단을 내려오면 두 사람이 서로 비켜갈 수 있는 작은 길이 강물 따라 나 있고, 길에서 강물까지는 다시 계단 네 개였다. 강물은 쉴 새 없이 출렁이고 햇볕은 물결 위에 반짝였다.
비탈 제방 시멘트블록 위에 붉은 티셔츠 입은 한 남자를 본 것은 지난 3월 23일 오후 5시반 경이었다.
무엇이든 자세히 보아야 보인다. 관심을 갖고 보면 바로 눈에 들어온다. 그를 눈여겨 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있어도 잠시 머물러 바라보다가 가는 사람은 혹 있었다. 그 역시 벚꽃에도 오가는 인파에도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그의 손에는 작은 부엌칼과 날이 반 토막 난 낫자루가 들려 있었다. 그동안 여러 번 이 길을 다녔으련만 유심히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가까이 다가갔으나 그는 본체만체 묵묵히 하던 일을 계속할 뿐이었다. 자꾸 질문을 하자 몇 마디 응했다.
홍수가 나면서 진흙이 블록 사이에 쌓이고 거기에 풀과 나무가 뿌리를 박아 보기에도 안 좋고 언젠가 제방을 무너뜨릴 테니 제거하는 중이라고 했다. 나무는 이미 뿌리가 깊이 박혀 있어서 이렇게 후벼 파다보니 벌써 칼과 낫 두 개가 망가졌다며 낫을 들어 보였다. 고글 속 그의 눈은 신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인적사항 공개를 꺼리다가 기자의 명함을 받고서야 몇 가지를 알려 줬다. 김 씨, 75세, 대구고등학교 4회, 영남대학교 1회 졸업, 학군단 6기, 건설업 이력 소유자였다. 건물 방수작업을 위해 콘크리트 타설 전 스티로폼을 먼저 덮는 것이 지금은 일반적이지만 이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자신이었고 이후로 이 공법이 대중화됐다고 했다. 다음은 김 씨와 나눈 대화 내용이다.
▶대단하신 일을 하시는데 얼마나 오래됐습니까?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는데 정신이상이 아니면 이렇게 안 하죠. 8년째입니다. 처음에는 건너편 아양루와 인공폭포 그리고 그 옆 공원 잔디관리를 했는데 지난해부턴가 공공근로가 일을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피해서 이리로 왔죠.
▶이상한 게 아니라 대단하신 거죠. 이곳에는 얼마 됐지요?”
-현재 5개월째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일할 마음을 먹게 됐습니까?
-계단 하나 길이가 10m입니다. 이런 계단이 16개 있는데 하나 하는데 2시간 걸립니다. 계단에는 잡초도 있지만 홍수 때 흙이 쌓여서 그 속에 나무가 뿌리를 박고 자라거든요. 그리고 저 길에도 그렇고, 사람들이 못 다닐 정도였어요.
김 씨는 베어 낸 나무를 가리켰다.
▶낫이 부러졌군요.
-두 개 부러지고 이게 세 개째입니다. 나무뿌리가 돌 틈에 깊이 박혀 있어서 파내다보니 그렇습니다. 계단이 80m마다 있는데, 아양기찻길 부근에서 아양교 지나 승용차 내려오는 데까지 총 여덟 개거든요.
▶혼자서 너무 힘드시겠어요. 매일 나오십니까?
-매일 오후 3시 반 정도면 나와서 6시 무렵까지 합니다. 토, 일요일에는 12시부터 나오고요.
▶언제까지 하실 생각입니까?
-남이 알아주든 아니든 제 취미로 하는 거니까요, 아주머니들이 가끔 ‘세상에 이런 봉사하는 이도 있구나’ 하면서 음료수를 주는데, 그때 새 힘을 얻지요. 얼마 전에는 어느 남자 분이 토, 일요일 나와서 거들어 주기도 했어요.
이튿날 김 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인터넷으로 기자의 글도 읽어 보았다며 밝은 목소리로 이름을 알려줬다. 김영호 씨였다. 벚꽃은 한 주간 내내 화사했고 인파가 점점 늘어나면서 노점상도 증가했다. 국회의원 후보자도 여러 사람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관심이 있으면 눈에 바로 들어오는 법이다. 종일 방안에 있다가 저녁 무렵 운동하러 가는 길은 벚꽃이 있는 동안은 아양기찻길 건너로 가기로 했다. 그때마다 김영호 씨는 그 자리에서 일하고 있었다.
아양기찻길을 지나 왼쪽으로 가면 벚꽃 길, 입구에 길옥윤 작사 작곡 패티김 노래 ‘능금꽃 피는 고향’ 노래비가 있다. “능금 꽃 피고 지는 내 고향땅은/ 팔공산 바라보는 해 뜨는 거리/ 그대와 나 여기서 꿈을 꾸었네/ 아름답고 정다운 꿈을 꾸었네/ 둘이서 걸어가는 희망의 거리/ 능금 꽃 피고 지는 사랑의 거리/ 대구는 내 고향 정다운 내 고향”
이 노래의 또 다른 이름은 ‘대구 찬가’다.
김영호(75) 씨 같은 분이 있어 대구는 희망의 거리, 사랑의 거리, 정다운 고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