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와주세요:
우리 아버지는 인물이 좋다고 소문이 난 3대 독자이십니다. 할아버지께서 금이야 옥이야 귀하게 기른 방앗간 집 외아들이었습니다.
19살에 결혼시킨 아들이 손녀인 나를 낳고 임신 소식이 없었으니 할아버지는 얼마나 애를 태우셨겠습니까? 전전긍긍하고 있던 중 아버지는 읍내 다방에 있던 아가씨를 아버지의 친구와 같이 다니면서 한 여자를 둘이서 번갈아가며 '봤다'고 합니다. 이상한 바람을 피운 것이지요.
아버지의 친구는 4남 1녀가 있었고 아버지는 나 하나였지요. 아가씨가 임신을 하고 아들을 낳자 아버지에게 "이 아이는 당신 아들"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아들도 없던 터라 아버지는 아기를 데려와 길렀습니다.
얼굴이 아버지를 한 군데도 닮지를 않아서 늘 꺼림칙했지만 가족들은 누구 하나 티를 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들이 아쉬웠으니까요. 그 동생이 자라 국민(초등)학교 들어간 뒤 얼마 있지 않아 그 다방 여자가 나타나 “내가 진짜 네 엄마다”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아이는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아이가 말도 없고 이상하게 변해가더랍니다. 어머니가 그 사실을 알고 그 여자를 찾아가 "네 아들이면 네가 데리고 가라"고 했지만 데려가지는 않고 가끔씩 나타났나 봅니다. 그 여자는 정말 악마였습니다. 그때부터 우리 집의 불행은 시작되었습니다.
아이는 4학년이 되자 공부는 멀리하고 점점 농땡이가 되어갔습니다. 아무리 타일러도 안 되고 중고등학교도 어렵게 졸업은 했습니다만 그 뒤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경찰서에서 연락이 오고, 빼주면 또 연락이 오고 빼주고 하는 괴로움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때는 친자확인도 없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기 짝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뭔지 아들문제로 늘 고심하시다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뒤따라 가셨습니다. 부모님 돌아가시고 가산도 탕진하고 계속 사고를 치니 아무리 관심을 안 가져야지 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 나이가 지금 84세인데 동생은 지금도 때때로 아내를 걷어차서 올케가 나를 찾아와 하소연하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조카들도 부모를 나몰라라 할 수밖에 없겠지요? 요사이 아내를 때리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나 역시 그의 그늘에서 정말 벗어나고 싶습니다, 사탄이 낳은 그는 악마였습니다. 지긋지긋합니다. 부모님들과 옆 사람들 애먹이고 가산 탕진하고 평생을 어찌 저렇게 살다니 기가 딱 막힙니다. 이 일을 어떡하면 되겠습니까?
조언 드립니다:
여자라는 이유로 험한 세월을 살아오셨군요. 남존여비와 남아선호사상이 사회를 지배했던 시절이라 아들, 아들 했지만 세상이 변하니 지금 생각하면 다 부질없는 생각 아닙디까? 그 시대는 대를 못 이으면 큰 죄인이라고들 했으니 그런 줄로 알고 살았고, 아들은 꼭 있어야 되는 줄 알았습니다.
위로 올라가 조선조 오백 년은 어떡했습니까? 가문을 위해, 남편이 죽으면 열녀문을 세우기 위해 여자는 아무 잘못이 없어도 희생되어야 했던 때도 있었고 남자가 버리면 버려져야 하지 않았습니까? 아들을 낳지 못하면 씨받이라고 해서 다른 여자를 데려다 아들을 낳고 쫓겨나는 비참한 일도 있었지요? 두 여자가 다 불행했던 것입니다.
하긴 시대가 바뀌어 이런 말도 할 수 있지만 그 시대에는 딸은 아들의 발가락 사이에 낀 때만도 못하다고 했었습니다. 저도 할아버지로부터 그렇게 들은 적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름도 고만딸, 끝순이나 끝니, 종말이라고 지었지요. 딸 그만 낳으라고 지은 이름을 평생 꼬리에 붙여 다니는 딸들의 서러운 시절이었지요.
그 뒤엔 태아 감별로 많은 여아들이 살해되는 일도 많았고요. 세계적으로 악명높은 인권침해였습니다. 세상이 변해 지금은 아들은 없어도 딸은 있어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대대로 물려온 재산을 동생인지 아닌지도 모를 아들이 탕진해도 딸이라는 이유로 말도 못하고 보고만 있어야 했으니 얼마나 속상하셨습니까. 세상이 그렇게 흘러가니 할 수 없었지요. 동생이 누나를 신경써야 될 연세이십니다.
동생으로 인해 더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 나이 되도록 친정에 신경쓰시니 옛날 어르신입니다. 그냥 마음으로부터 떼 내십시오. 뭘 어떻게 해줄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잘못된 아버지의 발걸음이 가족의 행복을 앗아갔고, 그 아들로 인해 부모도 일찍 돌아가시고 가정이 풍비박산 지경이네요. 아직도 아내를 때리는 그 사람은 구제불능입니다.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 같습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라더니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잊으란다고 잊혀지지는 않으실 겁니다. 마음대로 되면 걱정하실 일이 없지만 누나로서 하실 만큼 다 하셨습니다. 혼자만 생각하기에도 벅찬 나이이시니 부디 건강하시고 오래 오래 만수무강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