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시인 엘리엇(T.S. Eliot(1888∼1965)이 그의 장편시, 「황무지(The Waste Land,1922)」의 첫 구절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절규했다. 우리 현대사의 4월도 잔인했다. 1947년 제주4.3사건, 1960년 4.19혁명, 그리고 2014년 4.16 세월호 참사가 그러했고, 지금 겪고 있는 코로나19 사태의 4월도 잔인하다.
5부로 구성된 433행의 난해한 시, 「황무지」는 웬만한 영국인들도 무슨 말인지 잘 알 수 없는 서양 고전어, 라틴어와 헬라어로 되어있다. 이 시의 첫머리는 ‘죽고 싶다’ 라는 제사(題詞)로 시작하여, 고대인도 산스크리트어 ‘산티(Shantih), 산티(Shantih), 산티(Shantih)’, 즉 ‘평화, 평화, 평화’라는 갈망, 구원을 염원하면서 끝을 맺었다.
그는 왜 4월이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절규했을까?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약 1,000만 명이 죽고, 약 2,000만 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 당시 유럽은 물심양면의 폐허, 그 불모의 절망감에서 몸부림치는 외침이 바로 '4월의 잔인함'이었다. 그 때 유럽 사회는 ①불신(不信), ②불모(不毛), 그리고 ③불활(不活)의 늪에 빠진 상황이었다. 기독교 신앙을 잃어버리면서 발발한 비참한 전쟁이 낳은 정신적 불모지, 저주 받은 유럽 사회는 소생(蘇生)이 불가능한 황무지였다. 4월이 오고 라일락 피어나도 절망이 가득한 상황에 침잠하면서 잔인했을 것이다. 인간이 자초한 모순의 극치였다. 봄은 만물이 생동하는 부활의 계절이다. 그러나 공허한 추억과 덧없는 욕망으 꿈틀거림 뿐, 진정한 소생(蘇生)이 불가능한 유럽인들에게 잔인한 4월이었다.
여기에는 시인 엘리옷의 개인적인 상처도 연관되어 있었다. 1910년 프랑스 유학시절, 그와 절친했던 의대생 친구 장 베르느날이 1차 대전에 참전하여 1915년 4월 갈리폴리 해전에서 전사했다. 스위스 로잔에서 요양하며 이 시를 쓸 무렵, 전사한 그 친구가 라일락이 피는 룩셈부르크 공원을 가로질러 오는 듯한 환상에 몸서리쳤었다고 회고했다. 라일락과 4월은 생명과 죽음이 교차하는 뼈저인 상처였다. 4월은 아픔의 계절, 잔인한 계절일 수밖에 없었다. 이 시의 제1부 ‘죽은 자의 매장(埋葬)’은 이렇게 시작된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음의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어 일으키며,
무기력한 뿌리를 봄비로 부추나니,
겨울은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어 주고,
메마른 알뿌리로 근소한 생명을 키워주었으니,
우리에겐 차라리 따스했지요.
라일락이 피어나는 4월은 이미 자연이 주는 기쁨과 축복이 아니었다. 차리리 땅 속에 서 생명을 키우는 겨울이 더 따스했다. 오늘을 사는 한국의 동시대인들도 반목과 질시를 거듭하며 무한 경쟁으로 질주하는 황무지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겉은 화려해 보이지만 정신적인 불모지로 변하면서 황량하고 공허하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날마다 불신을 조장하며 서로 죽이고 죽이는 전쟁이 계속하는 황무지로 전락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황폐한 정신 상황, 그 황무지에 4월이 오고 라일락이 피어난들 무슨 기쁨과 희망이 있겠는가? 비참하고 잔인할 뿐이다. 무모한 전쟁을 멈추고 황무지를 풍성한 옥토로 계량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부디 이번 4.15 총선이 우리 조국의 앞날에 축복이 되길 희망한다. 훗날 역사가들은 물론 오늘을 사는 동시대인(同時代人)들 모두에게 이번 총선이 ‘잔인한 라일락’이 되지 않아야 한다. ①신뢰를 바탕으로 상생하는 출발점이 되고, ②풍요한 미래를 설계하는 청사진이 되며, ③ 자유와 평화의 나라가 되어 전세계를 선도하는 우리 민족의 저력이 펼쳐지는 계기가 되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