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선의 ‘매를 맞다’
냉동실 문을 여는데
순간, 아찔하다
묵직하고 단단한 것이 발등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발을 움켜쥐고 절뚝거리다가
가만히 들여다본 물체
비닐봉지에 담긴 주먹만한 고깃덩이다
물렁물렁하던 살점도 화를 내니 무섭구나
냉동실에 쑤셔 넣고 까마득히 잊고 있던
한심한 주인에게 호된 매질을 하는구나
놀란 가슴 쓸어내리며 냉동실을 정리한다
모처럼 환한 세상으로 나온
나물 뭉치 생선 뭉치 떡 뭉치가
산더미처럼 쌓여 나를 나무라고 있다
제발 살림 좀 잘하거라
계간 《불교문예》 2020년 봄호
코로나19로 의도치 않게 냉장고 다이어트를 시켰다. 덕분에 나는 큰소리 한번 쳤다. 사재기 선수라는 불명예가 준비성 있는 주부로 거듭난 것이다. 대체 무슨 심리일까. 냉장고가 미어터지도록 식재료를 쟁여놔야 직성이 풀린다. 필요한 만큼만 사라는 남편의 잔소리는 우이독경. 나들이를 가더라도 그 지역의 특산물 한두 가지는 반드시 산다. 관광객으로서 미덕의 자세란 억지논리까지 편다. 오일장이 서는 동네로 이사 온 지 3년째다. 한 장만 걸러도 궁금하고 서운하다. 눈에 들어오는 대로 주섬주섬 사와선 냉동실에 모셔둔다. 비상식품이란 이유의 꼬리를 붙인다. 사람은 작은데 왜 그리 통이 크냐는 핀잔을 귀 따갑게 듣지만 개의치 않는다.
‘제발 살림 좀 잘하거라' 나를 일갈하는 것 같아서 움찔 놀란다. 주부가 읽는다면 그래그래, 마치 자기 이야기인 듯 공감하리라. 고깃덩이에 발등 찍힌 일화를 ‘매를 맞다’란 고백적 형식을 취하여 시로 형상화시켰다. ‘물렁물렁하던 살점도 화를 내니 무섭구나’ 꽁꽁 언 비닐봉지 뭉치가 무기로 돌변하면 정말 아프다. '한심한 주인' 그런 변을 당한 게 한두 번이랴. 숨 쉴 여지를 마련해두는 것이 효율적이란 전문가의 조언을 귓등으로 흘린다. 불시에 손님이 온들 엎어지면 코 닿을 데 마트가 즐비한데도 말이다. ‘나물 뭉치 생선 뭉치 떡 뭉치’들 느닷없는 자가 격리 중에 요긴하게 쓰이지 않았을까? 무릇 살림 잘하는 주부라 자화자찬해도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