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습니다” 모든 의미 함축한 남편의 가슴앓이
너무나 그립고 보고 싶습니다!
“치매는 한 사람의 삶을 파괴하는 걸 넘어 주변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 삶까지 파괴한다.”
내가 누구인지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의 아내와 남편, 아들과 딸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무시해버리는 데서 인생의 여정이 펼쳐지며, 하루하루 평범하게 지나가는 삶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잊고 사는 데서 시작한다는 것을 우리는 자주 잊고 산다.
“암은 자기의 고통을 직접 느끼지만 치매는 스스로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슬프겠어요.”
우리나라의 고령화는 급속도로 진행 중이며 국민 1천 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노후 가장 무서운 질병으로 치매(34.9%), 암(22%), 심혈관질환(14.1%), 관절염, 골다공증, 신경통 등이었다. 치매원인질환은 알츠하이머(68%), 혈관성치매(19%) 등의 순위였다.(2019 시사저널)
‘치매가 부른 비극...’ ‘사랑하니까 같이 가자, 치매부인 살해한 할아버지’ ‘치매노모 살해, 암매장 뒤 자수한 아들’ ‘갈수록 늘어나는 치매살인, 간병하다 내 건강 악화’.... 치매로 인한 사회문제는 이미 우리 주변에 다가와 있다.
지난 30여 년 힘든 일을 겪으며 오직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지키기 위해 함께한 부부, 60세 젊은 나이에 받은 남편의 치매 판정. 그리고 그 남편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낸 한 사람의 사연을 알아본다.
◆남편의 고장난 시계
“요즘도 매일 울면서 살아요. 어젯밤에도 퇴근한 둘째 아들과 인기 가요 프로그램을 보며 울다 웃다 했어요. 그랬더니 아들은 '엄마는 매일 울고 웃느냐'고 합디다."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람. 2018년 11월 27일 화요일 새벽, 너무도 일찍 찾아온 이별이었다. 남편에게 입을 맞추며 목 놓아 엉엉 울었던 그날이 생생하건만 어느덧 1년 7개월의 시간이 그리움과 공허함으로 말없이 흐르고 있다.
60세에 치매 진단을 받고 '세 살배기'가 되어버린 남편과 6년 동안 그간의 못 다한 사랑을 함께했던 배윤주 씨(69·여·대구 수성구).
“남편을 돌보면서도 함께했던 시간이 참 행복했습니다. 이렇게 빨리 떠날 줄은 몰랐습니다.”
남편이 자동차 사고를 자주 냈고 대처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휴대폰 사용도 서툴러졌으며, 약속 장소를 찾지 못하거나, 전자제품 리모컨 버튼도 잘 못 누르는 일이 많았다. 평소 하던 일에서도 실수가 잦아졌다. 익숙했던 것들과 이별을 하는 듯 말수가 부쩍 줄었고 행동도 소극적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알아채지 못했다. 워낙에 집안 일에는 관심이 없었고, 어린 시절 집에 일하는 사람이 있었기에 해보지 않아서, 하기가 싫어서 그런가 보다 라며 배 씨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며칠 후 신경과 의원을 방문했다. 진단을 받고 MRI를 찍었다. 의사 선생님이 정상적인 뇌 사진과 남편 사진을 비교하여 보여주었다. 남편의 뇌 크기가 확연히 줄어 있었다. 의사는 남편이 알츠하이머 치매로 의심된다며 그나마 빨리 발견되어 다행이라고 위로했다.
“처음에는 남편이 치매라는 사실을 받아 들일 수가 없었어요. 사진으로 확인을 했음에도 사실을 인정 할 수 없었죠. 하늘이 무너지고 눈 앞이 까마득했는데, 정작 함께 간 남편은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였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런 말이 없었어요."
이제 겨우 60세. 다들 이제 인생의 시작이라고 말하는 그 60세가 되었을 뿐인데.... 이때부터 ‘벤자민 버튼의 시계'와는 반대로 남편의 시계는 고장이 나기 시작했다. 시부모 봉양과 자식 뒷바라지, 직장 생활로 누구보다 열심히 바쁘게 살아온 배 씨. 그러나 절망보다는 또 다른 희망을 생각하며 더 큰 용기를 냈다.
◆고맙습니다, 세 살배기 남편
“착한 행동을 하면 포옹을 하고 텔레비전에서 가수들의 노래를 들으며 함께 박수치고 장단 맞추며 늘 웃음이 가시지 않았어요. 늘 '고맙습니다'란 말을 달고 산 남편은 예쁜 치매 환자였습니다."
가부장적이고 한때 부잣집 장남이었던 남편. 그의 말 한마디에 대꾸도 못하며 항상 을(乙)의 인생을 지금까지 살아왔던 배 씨는, 이제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남편 때문에 뜻하지 않는 슬픈 갑(甲)의 인생으로 바뀌었다.
배 씨는 직장생활, 시어머니 봉양과 남편 돌보기로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이른 나이에 찾아온 치매를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하여 약을 먹고 그림도 그리고 글쓰기를 하는 등 좋다는 것은 다 했다. 그러나 병의 진행 속도는 너무나 빨랐다.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길을 잃어 3일 만에 다른 동네에서 겨우 찾기도 했다. 식사, 배변 등 남편은 모든 것이 성장하지 않고 멈춘 세 살배기 어린 아이처럼 배 씨 손이 필요했다.
“남편의 치매 속도가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고, 좋다는 것은 다 해보았지만 조금도 늦춰지지 않아 너무 당혹스러웠다”며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분들에게 이럴 때일수록 놀라지 말고 대처하라고 조언한다.
천주교 신자였던 배 씨지만 남편을 고칠 수 있다는 말에 형편이 어렵지만 많은 돈을 들여 굿을 해보기도 하고 교회도 다녀봤다. 매주 남편과 함께 팔공산 갓바위에 올라 기도를 올리기까지 해 보았지만 지나고 나니 모두가 허사였다.
남편과 동갑인 배 씨는 남편을 뒷바라지하면서도 평생 근무한 모교인 대학에서 62세로 정년퇴직을 했다. 정년 후 인생2막을 꿈꾸어오던 것도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으며, 오직 사랑하는 남편을 위한 열정으로 요양보호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노치원(老稚園), 병원생활 그리고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람
의사는 남편 치매가 다른 환자들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며, 하루 종일 집에서 남편을 돌보는 것보다는 전문기관에 보내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조언했다. 주간보호센터(노치원·老稚園)를 알아보고 63세의 가장 어린 노치원생으로 오전 오후 통학(송영)차량으로 등교시켰다. 적응도 잘 하고 다른 어르신 노치원생들을 돕는 모범생으로 전성기(?)를 보냈다고 한다.
친형제, 처가 식구들과 늘 우애가 깊었던 남편은 틈틈이 가족들이 마련한 모임과 여행 등 행사에도 참석했다. 비록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지만 '고맙습니다‘와 웃음으로 감사를 전했다.
노치원 생활을 하던 중 배 씨의 남편은 성격변화와 이상 행동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예쁜 치매에서 폭력적인 치매환자 증상으로 빠르게 변해갔다. 더 이상 노치원을 다닐 수 없었다. 어떻게 하든 남편을 곁에서 돌보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이를 지켜보는 가족들도 지쳐갔다. 주변에서 저러다 멀쩡한 사람 먼저 잘못되겠다며 “어렵겠지만 요양원에 보내고 나아지면 다시 데리고 오자”고 강권했다. 남편을 요양원에 입원시키고 토요일 일요일에 집으로 남편을 데려오는 주말부부 생활을 이어왔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건장하던 체격도 야위어가고 복용하는 약들도 많아졌다. 이상행동이 잦아지자 요양원에서는 낙상 등을 우려하여 남편의 양 손에 장갑을 끼운 채 침대에 결박해 두었다. 그러나 낙상으로 인한 골절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고, 각종 질병으로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가는 횟수도 점차 늘어났다. 폐렴과 호흡기 질환 등으로 종합병원 응급실을 거쳐 중환자실에서 힘든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결국 요양병원에서도 중환자실로 가야 했다.
남편이 요양병원 입원 후 매일 곁에서 간호하며 배 씨는 남편이 얼마나 더 버텨줄까 걱정했다. 처음에는 73세에 돌아가신 시아버님 만큼만 살아줬으면, 70까지만 살아줬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다 '올해까지만, 이번 아버님 제사까지만, 이달 말까지 만이라도...' 하며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이별은 배 씨의 간절한 소원을 한 가지도 들어주지 않고 27일 새벽 가족 누구도 지켜보지 못한 채 낙엽 따라 가버리고 말았다.
“언니 좀 쉬라고 오빠가 그렇게 조용히 갔나 보다. 언니는 오빠하고 한 달이나 같이 병원에서 지냈는데 임종을 안 보면 어때? 고통 없이 조용히 잘 가셨다니 됐잖아.”
“친구 창웅이는 먼저 가 아쉽지만 지극 정성 함께한 부인이 있었기에 이승에서는 누구보다 많은 사랑을 받았잖아. 그런 친구이기에 슬프지만 부럽네. 부디 다음에 만날 때는 아프지 말고 환한 얼굴로 다시 만나세. 잘 지내시게 친구야.”
◆백마 탄 왕자, 그리고 도피생활
배 씨와 남편은 대학시절 초등학교 동창모임에서 만났다. 한 반에 80명, 한 학년 20학급 1960년대 초 교실이 부족해 아침반, 중간반, 오후반 수업을 했던 시절 서로 얼굴조차 모르고 졸업했다. 그들은 대학 에 와서야 처음 얼굴을 보았고, 배 씨가 졸업 후 중고교 교사 시절, 군 제대후 복학을 준비하는 남편과 시내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 본격적인 연애를 시작했다. 가정 형편이 배 씨 집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부잣집 도련님, 백마 탄 왕자인 남편의 사랑을 믿으며 당시에는 29살 늦은 나이 우여곡절 끝에 결혼했다. 엄격하고 가부장적인 부잣집 맏며느리였다.
시어머니의 성격을 잘 아는 남편은 배 씨에게 교사를 그만두고 대학원에 진학하라고 권유했다. 남편은 대학 졸업 후 짧은 기간 직장 생활을 했지만 곧 본인이 사업을 시작해 승승장구했다. 사람 좋고 호탕한 남편의 사업은 IMF 직전 15년 만에 문을 닫았으며, 시댁의 그 많던 재산도 하루 아침에 바람처럼 사라지고 당장 가족이 기거할 곳도 없는 처지가 되었다. 다행히 대학 은사님과 지인들의 도움으로 방을 마련해 예전과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생활을 했다.
“돌이켜보면 장남으로서 가족에게 다하지 못한 책임감과 강한 자존심으로 심한 스트레스와 강박증으로 살아온 것 같습니다. 훌훌 털어버렸으면 좋았을 텐데요.”
남편은 부도 후 도피생활을 시작했다. 훗날 소식을 듣고 찾아가 보니, 쓰지 못하여 버려진 농가의 닭장을 개조해 기거하며 살고 있었다. 15년간의 기나긴 이별 후 다시 만나 조그마한 사업을 시작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치매진단을 받았다. 지난 시절 오직 가족과 남편과의 재회를 꿈꾸며 살아왔다는 배 씨는 가슴에 담은 애기를 하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책 출간 ‘세 살배기 남편 그래도 사랑해’
남편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고 죽음 같은 생활을 이어갔다. 그 즈음 평생 은사이며 나침반이었던 박찬석 교수(전 경북대학교 총장)가 조언을 주었다. “치매가 어떤 병인지 우리는 안다. 누구든지 죽어도 치매로 죽기는 싫다는 병이다. 아직도 완벽한 예방과 효율적인 치료약은 없다. 치매는 운명이고 가족도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죽는다. 치매에 관한 많은 이야기는 소설로 일화로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직접 글로 쓴 체험담은 적다. 젊어서 치매에 걸린 남편을 돌보며 겪은 애환을 담아 책으로 펴내어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다른 지인들도 힘내라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남편이 떠난 후 8개월 만인 2019년 7월 27일 치매환자인 남편을 간병하면서 겪은 아픈 이야기는 책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애환이 묻어나는 망부가(望夫歌) '세 살배기 남편 그래도 사랑해'(도서출판 청년정신)이다.
책 출간을 위해 직접 전국 250여 개의 출판사에 연락을 하였으나 선뜻 출판을 하겠다는 출판사는 손에 꼽을 정도였고 겨우 의견이 맞았던 곳과 출간하였다. 남들은 출판기념회를 연다고 하지만 망부가이기에 더욱 조심스럽다고 배 씨는 밝혔다.
전문 작가의 글도 아니고 가공하고 윤색한 글도 아니다. 진솔한 이야기를 배 씨의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 그 아픔과 회한을 10분의 1도 토해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치매 남편과 울고 웃고 행복했고 절망했던 6년의 삶. 치매환자를 돌보는 고단함과 간병기만으로는 볼 수 없는 삶, 그리고 사랑이란 무엇인지 되돌아 볼 수 있는 기록이다. 소설이 왜 실제의 삶과 괴리된 허구인지 보여주는 기록이며, 진정한 사랑이란 어둡고 힘겹고 절망적일 때 나타나는 것이라는 걸,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각설탕 같은 사랑과는 다르다는 걸 볼 수 있다.
◆가슴에 묻어둔 못 다한 이야기, 그리고 인생2막을 꿈꾸며
배 씨 인생은 겉모습과는 다르게 애환이 많다. 이름이 3개이다. ‘숙희’로 30여 년을 살아오던 그는 결혼 후 시부모님께 귀한 맏손자를 안겨드렸으나 정확한 병명을 알 수 없는 중복장애의 진단을 받았다. 시어머니가 며느리 탓을 하며 ‘윤주’로 이름을 바꾸었다. 속된 표현으로 호적을 파뒤집었고, 좋은 말로 개명한 것이었다. 직장 생활과 가장의 역할을 병행하다 보니 장애를 가진 아들은 외할머니 손에 자라야 했다. 아들은 26세이던 2007년 서울의 병원에서 수술 중 먼저 하늘나라로 갔다. 친정의 형제들도 7녀2남 이지만 언니 1명, 오빠 1명과도 영원한 이별을 했다. 남편을 먼저 보낸 후 힘든 모습을 보고 한 지인이 집에서 부르며 좋다며 ‘권해’라는 이름도 지어주었다. 배 씨는 ‘숙희’에서 ‘윤주(권해)“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95세인 친정어머니와 92세의 시어머니가 계신다.
배 씨는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왔고 앞으로도 열심히 살 것”이라며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겠다”고 했다. 어려울 때마다 도움을 아끼지 않은 대학 은사님과 남편의 친구, 힘들고 어려울 때 집안일에 똑 부러지게 교통정리를 해주는 막내 시누이와 가족 그리고 많은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전했다.
배 씨는 문학박사로 평생을 대학에서 교직생활을 해왔다. 최근엔 요양보호사, 치매예방전문가 과정도 이수했다. 치매를 직접 간병한 경험까지 있어 필요한 곳이면 언제든지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다. 취미로 시작한 수채화에도 한창 재미를 붙이고 있다. 영원한 ~ing인 배윤주 씨의 인생 2막에 꽃길만 가득하길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