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부대를 나섰다. 태원은 권총을 바지 호주머니에 넣은 채였다. 그들은 후문 바로 앞에 있는 조그마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 할머니는 묻지도 않고 그들에게 막걸리 한 주전자를 갖다 주었다. 박 하사가 아무 말도 없이 흰 대접에 가득 막걸리를 따랐다. 다음에 자신의 잔에 스스로 따르려 하자 태원이 주전자를 뺏어 박 하사의 잔에 가득 따라주었다. 그 둘은 대접을 힘차게 한 번 부딪친 뒤 벌컥벌컥 소리 나게 한 잔씩 하고는 이번에는 태원이 박 하사의 잔에 술을 따르고 다음에 박 하사가 태원에게 술을 따랐다. 물론 술이야 박 하사가 한 수 위였다. 그러나 오늘은 이상하게 태원이 한 수 위처럼 술을 마셔댔다. 우선 김치 한 조각씩을 씹으며 그들은 숨을 골랐다.
“박 화우, 니 생각나제? 이 권총 하나 가질라고 내가 쇼를 하던 때 말이다.”
태원의 말이 갑자기 그의 고향 말투로 바뀌었다.
"하므요. 생각나지요. 실장님이 만날 그 큰 키에 길다란 칼빈 매고 행사에 참석하는 모습이 참 보기 안 되었드랬습니다. 사실 실장님은 권총을 차야 제격이지요.”
"야! 니 요새 장교 포기한기가?”
"그기 무슨 말씀입니꺼?”
"내가 보이 니가 이발소 광자한테 마음이 있는 것 같던데?”
“와 그라마 안 됩니꺼? 광자는 좋은 아라예.”
“와 내가 갸가 나쁘다 캤나? 니는 전에는 술, 요새는 가시나 이런 데 빠져 있는 거 같애. 그래 가지고 니가 내년 의정장교 시험에 합격할 거 같나? 내가 전에 안 카드나. 내가 제대하고 가더라도 니가 군에 남아 내 뜻을 이어가라고 말이다.”
“잊지 않고 있심더.”
"내가 나가면 니는 금년 봄에 우리가 심은 산 사꾸라하고 산복상나무를 계속 살리야 돼. 알겠나? 그라고 내가 얻어 와 우리 의무대 막사 주변에 둘러 가며 심어 논 개나리도 잘 키와야 되고. 그라고 뭣보다 니가 꼭 장교가 되야 되는 기라. 니 본부대 김무열 대위 알제? 그 친구도 처음에는 구급차 운전병이었어. 그래 가주고 나중에 장교까지 된 기라. 그 사람이 그래 놓으니 옛날 사병 쿠세가 가끔 나오잖아. 마시면 니처럼 뿅 가서 곤조가 나오는 이유가 그런데 있는 기라.”
박 하사는 어리둥절했다. 태원이 창문을 깨는 행동이나 아무리 술을 먹었더라고 이렇게 막말로 두서없이 이야기하는 법은 절대 없었다. 더구나 고향 사투리로 말이다.
“와 어디 가십니꺼?"
"그래 간다. 와? 사람이란 한 번 왔으마는 다시 가야 되는 기 자연스러운 거 아이가?"
태원은 빈 속에 마신 술 탓인지 평소에 못 보던 행동을 했다. 이런 의무실장의 흐트러진 언동을 박 하사는 처음 보았던 것이다.
“지도 들었는데요. 그 부군단장 딱가리 하던 녀석한테요. 실장님이 황 장군님의 필수요원으로 삼사 가신다는 이야기 다 들었어예. 그렇지만 다들 그렇게 안 될 끼라 카던데요?"
"그건 또 무슨 소리고?"
“지금 군단장님이 실장님을 우리 부대 필수요원으로 육본인사운영감실에 미리 말씀드리 났다 카던데요. 그러니까 실장님은 내년 한 해 여게 더 계시다가 제대하는 겁니다. 그라고 저희도 잘 모실게요.”
“야! 이 병신 새끼야. 니 눈에 안 비나? 내가 이렇게 권총 들고 탈영한 거를.”
"하하하! 실장님도 취하시니까 농담도 다 하시네. 그렇게 하시니까 지도 기분이 좋네예. 자 또 한 잔 하시이소.”
박 하사가 잔을 그득 채웠다. 술이 들어가니 몇 달째 가슴 속에 구름 낀 듯 퍼져 있던 우울증이 한꺼번에 다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술 탓만이 아닐 것이다. 태원의 결심이 이미 섰기 때문일 것이다.
“박 하사, 아까 말하던 광자 이야기 더 해보제이, 나도 갸한테 흥미가 있어. 왜냐면 갸가 원래 집이 거창이라 카제? 고향도 우리와 같은 경상도지만 나는 갸의 과거에 흥미가 있어. 전에 내가 이야기를 좀 해보이 구로동서 미싱을 밟았더만. 그래서 내가 물어봤지. 와 공순이 생활을 그만 뒀느냐고 말이다. 그카이 갸 하는 말이 '외로웠어예' 라고 카데, 그래서 내가 뭐가 그렇게 니를 외롭게 하드노 물었더니만 '아픈 사랑 때문에예'라고 하더군”
"그라마 실장님이 저보다 먼저 갸를 사귔네예. 에이, 엉큼도 하셔라.”
박 하사도 오늘은 장교 하사를 떠나 태원에게 형처럼 어리광을 맘껏 부렸다.
“내 보기에 광자 갸가 니하고 비슷한 기라. 니는 대구극장 영사기사 하다 노동조합 한다고 육갑 떨다 입대를 했고, 갸도 구로동서 노조 하다가 짤렸다 카더라. 너거들 차라리 이북 가마 어떤노?"
이 소리를 듣고 박 하사는 소스라치듯 놀랐다. 대통령 친위부대인 이 군단 그것도 그 사령부 문 앞에서 어떻게 이런 겁 없는 소리를 하는 걸까? 저 사람이 나를 시험하는 걸까? 아니면 주정하는 걸까? 온갖 의심이 갔다. 하긴 소문에 태원의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것도 들은 적이 있으니까. 어쩌면 자신의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요즘 실장의 하는 행동이 어딘가 갈 것 같은 느낌을 주는데 혹시 그곳이 이북일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야, 나도 이북 갈 생각을 한때 해봤다고. 하지마는 전방서 살아 보이까 저이들이나 나나 같은 사나이로 태어나 각자가 속한 그 집단을 위해 싸우다 죽는 것이 멋진 일이라고 생각해서 마음을 고쳐 먹은 기라.”
"그라마 실장님은 보숩니까, 진봅니까?”
"야! 이 새끼야 그따위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는 하지도 마라. 그 따위는 다 높은 놈들이 우리를 알가 묵을라꼬 맨든 소리에 지나지 않아, 김일성이도 제 새끼를 다음 후계자로 키우고 있다고 안 카드나? 그런기 우째 공산주의고? 김씨 왕조지. 모든 이데올로기는 우리나라에 들어오면 변질되는 기라. 북에서는 공산주의를 신왕조로 변질시키고 남에선 자본주의를 한국적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새로운 독재주의로 변질시키고 있는 기라. 그라고 소위 운동권이란 놈들도 다 그렇고 그런 놈들 아이가. 그 새끼들 군대 갔다 온 놈 있나 말야. 진보고 보수고 다 사기꾼들이제.”
"하여간 저는 장교가 되어 실장님의 소원을 성취시켜 드릴랍니다.”
"야. 니가 장교 되는 기 나하고 무신 관계고? 나는 니가 신분 상승 되는 방법 중 그기 니를 위해서 젤 낫겠다 싶어서 한 소리라. 박 하사, 앰뷸런스 불러”
"아니 그건 또 무신 소립니꺼? 갑자기 웬 앰뷸런스를요?"
“59 후송병원 가자!!”
“57 후송병원이 아니고 예?”
"그래, 청평 있는 59말이다.”
“실장님예, 우리 후송체계는 파주 101야전병원, 창동 57후송병원 그라고 수도통합병원 순서가 아입니까?"
태원이 그의 바지에서 갑자기 권총을 끄집어내 들었다. 비록 탄창이 없어 실탄 발사는 되지 않을 테지만 남들의 가슴은 충분히 서늘하게 하였다.
“빨리 불러, 인마.”
모든 군의관은 출퇴근 때 앰뷸런스를 타고 다녔다. 하지만 태원이 온 후로 그런 짓은 없어졌다. 그러던 사람이 오늘은 야밤에 환자도 없이 그것도 남의 후송병원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실장님, 환자는 어디 있는데요?”
"이 새끼 디기 말이 많네. 어디 있기는 어디 있어? 여게 있지.”
태원은 권총 총구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많이 취한 태원을 태운 앰뷸런스는 군인 아파트 동네에서 일행을 내려주고 부대로 돌아갔다.
"실장님, 청평 다 왔습니다. 59병원 앞입니다. 들어가시죠.”
그러면서 박 하사가 술집 추월옥으로 태원을 안내해 들어갔다. 술집 안에는 미리 연락을 받은 의무실 선임하사인 이 상사가 앉아 있다가 일어서며 그들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멸공! 아이고 실장님. 반갑습니다. 야들아, 전부 모여!"
이 상사가 신명을 돋울 듯이 소리쳤다. 한복 차림을 한 작부 셋이 들어왔다. 태원 일행을 보자 년들은 반색을 하는 시늉을 했다.
"아유, 오빠들 오랜만이네. 불광동 계집애들만 좋아하시는 줄 알았더니 우리 같은 년들도 찾네요?"
이죽거리며 옆에 앉았다.
"야, 이년들아! 그럼 여긴 청평이냐, 불광동이냐? 도대체 어디란 말이냐?"
태원이 고함을 질렀다. 눈치 빠른 작부들은 선임하사의 눈짓을 한 번 보고는 이내 의미를 알아차렸다.
“아이, 오빠도 많이 취하셨나봐? 내가 장난으로 한 말을 갖고 역정을 내시다니. 여기 실장님의 마음의 고향, 바로 불광동 미스 킴네 ‘마시자 위스키 시음장’이죠.”
애교 섞인 태도를 내어 말하며 태원의 가슴에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