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교육소설'
학교와 공교육을 배경으로 한 교육소설이다. 지은이 권재원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독어교육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 지역 공립 중학교 사회과 교사이다. 이 책에는 공립 중학교 교사인 권오석을 주인공으로 한 6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1. 나미 엄마
권오석의 옆집에 사는 나미 엄마가 나미의 성적이 나쁘다는 이유로 나미와 밤늦게까지 큰 소리로 싸움을 해서 권오석의 잠을 설치게 한다. 이튿날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구입하던 나미 엄마가 권오석을 알아보고 나미가 권오석의 독자라면서 사인을 받는다. 그날 밤 또 싸움을 해서 옆집을 방문한 권오석에게 나미 엄마가 사과한다. 다음 날 스타벅스에서 글을 쓰다가 식사를 하러 간 지하 식당에서 나미 엄마를 만난다.
“매달 은행 이자만 120만원씩 나가요. 거기에 나미 학원비도 100만원 넘게 나가고요. 나미하고 나미 동생 교육에 올인하자고, 딱 10년만 고생하자고 대치동 들어왔어요. 애들 챙기려고 직장도 그만뒀는데, 애들 아빠 월급만 가지고 감당하려니까 척추뼈가 하나하나 빠져나가는 것 같아 너무 힘들어요.” 순댓국과 떡볶이를 앞에 두고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나미 엄마가 나한테 하는 말인지, 혼잣말인지, 아니면 하느님한테 하는 말인지 모르게 중얼거리던 게 떠올랐다. 그렇게 힘들다면서 그 모피코트와 명품백은 뭐냐고 물어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는데, 벌써 표정을 읽었는지 나미 엄마가 이어 말했다. “학부모들한테, 학원 사람들한테 얕잡아 보이지 않으려면 또 돈이 들고요. 밥값을 줄이는 수밖에 없어요.”(33쪽)
2. 풍기문란 기간제 교사
서울대 사범대에 다니면서 노동운동을 하던 권오석은 임용고시 거부 투쟁에 앞장선다. 졸업 후에 기자가 되어 두 달간 다니다가 사표를 낸 후 백수가 된다. 어머니의 구박과 과 조교의 소개로 사립여고 임시교사가 되기 위해 면접을 보러 간다. 교감과 이사장을 면담하고 온 날 교감이 전화로 남교사는 풍기문란이 우려되어 채용이 어렵다고 말한다. 어머니가 전화를 빼앗아 교감과 흥정을 벌인다.
어머니의 입을 통해 교감이 무슨 말을 했는지 확인하자 확실히 내가 세상을 너무 몰랐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5백에 2년짜리요? 그래는 못합니다. 2천에 정교사 합시다. 어때요?” 어릴 때부터 흥정하는 어머니 모습을 보고 자랐지만, 교직을 놓고 이렇게 흥정이 오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 교감 목소리가 다시 어쩌구 저쩌구 들리는 걸로 보아 성을 내기는커녕 정말 흥정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신규 교사 연봉이 1,200만 원을 넘지 못하는 걸 생각하면 5백만원이니 2천만 원이니 하는 돈은 엄청난 금액이었다. “3천이요? 좋아요. 3천으로 합시다. 뭐라고요? 이사장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요?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니 내일 확정 지읍시다. 나도 애하고 또 애들 아빠하고 얘기해 봐야 하니까. 그만 먼저 끊습니다.”(66~67쪽) 권오석은 어머니의 훈육을 받고 난 뒤 임용고시를 보고 공립학교 교사가 된다.
3. 노동자가 되기 싫어서, 노동자가 되고 싶어서
대학에 다니면서 노동운동을 지도하던 권오석은 한 살 아래인 노동자 정상권과 친하게 지낸다. 상권이는 파업을 주도하다 회사에서 해고되고 다른 회사에 취직도 하지 못한다. 상권이는 교사가 되고 싶었으나 가난해서 노동자가 되었다고 말하면서 권오석의 오피스텔에서 뛰어나간다. 권오석이 교사가 된 후 25년째가 되던 해에 가르친 중학교 3학년 제자 우민규는 특성화 고등학교 항공정비과에 입학해서 항공사가 되고 싶었으나, 성적이 낮아서 일반계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노동자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던 상권이. 노동자가 아니라 공부를 하고 싶어 했던 상권이. 돈이 없어서 노동자가 되었노라 말하던 상권이. 그러고 보니 상권이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다면 지금쯤 딱 민규 정도였겠다. 상권이는 가난해서 공고에 갔다고 울먹였다. 세상이 확 뒤집히기 전에는 노동자를 면할 수 없다며 하늘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민규는 성적이 안나와서 공고에 못가고 어색하게 웃는다. 그래서 일반계 고등학교에 간다. 가난했던 상권이는 노동자가 되었지만, 공부를 못한 민규는 노동자가 될 기회를 잃어버렸다. 그만큼 노동자의 지위가 높아진 것인가? 그럼 그만큼 세상이 바뀐 것이라고 봐도 좋을까? 뭐가 뭔지 모르겠다.(100쪽)
4. 명진이의 수학여행
권오석이 가르친 제자 도명진이 커리어 우먼이 되어 권오석을 찾아온다. 16년 전 중학교 2학년 2반 부회장이었던 도명진은 2학기가 마무리되던 가을부터 지원이 등 학급 학생들로부터 집단 따돌림을 당한다. 권오석은 명진이를 따로 불러 지도하고, 3학년 때 담임을 맡는다. 명진이는 4월부터 신장병으로 한 달 동안 결석하다가 중간고사를 치르고 난 뒤 수학여행을 가겠다고 한다. 수학여행 첫날 저녁에 명진이의 상태가 악화되어 구급차를 부른다.
구급차 소리가 들렸다. 구급대원을 맞으러 나가려는데 갑자기 보건실 앞에 아이들의 긴 줄이 늘어섰다. 지원이를 선두로 아이들이 차례차례 돌아가며 명진이를 안아 주고 있었다. 눈물을 참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남자아이들 같았으면 참았을 텐데. 문득 눈물을 참고 있는 내가 너무 갑갑하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아이들은 돌아가며 한마디씩 뭐라고 했다. 힘내라고 하는 아이도 있었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아이도 있었다. 지원이는 꺽꺽 소리를 내며 울고 있었는데, 오히려 명진이한테 부담이 될까 걱정될 정도였다. 와니가 얼른 눈치채고 지원이를 데리고 나갔다. 그렇게 깡마른 열다섯 소녀, 가혹했던 신체적 사회적 침몰에 고통받고 있던 명진이는 적어도 사회적 침몰에서 구조되었다. 외톨이가 되어 괴로워하던 명진이가 거의 모든 여학생들의 포옹과 격려를 받으며 구급차에 실려가는 모습을 보니 번개처럼 스치는 깨달음이 있었다. 도덕으로는 세상을 구할 수 없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올바르다는 것을 알아도, 느끼지 못한다면 사람은 결코 선해질 수 없다. 그리고 그 느낌은 고통을 함께 겪지 않고 그 고통에 죄책감과 후회를 느끼지 않으면 안 된다.(141쪽)
5. 애국 소년단
일본어 교사 신혜정이 권오석을 찾아온다. 권오석이 담임하고 있는 학반 회장인 김정식이 일본어 시험을 거부하면서 OMR카드에 낙서를 하여 0점을 받았고, 신혜정에게 토착왜구라고 했다는 것이다. 권오석은 김정식에게 자신이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예학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한다. 권오석은 친구들과 함께 일본어를 배우는 누나의 책을 빼앗아 ‘일본어’라는 글자 위에 ‘쪽발이 말’이라고 쓰고, 책 뒷면에 ‘왜놈 앞잡이가 보는 책, 이 책을 볼 때마다 왜놈이 우리에게 한 일을 떠올릴 것. 대한 독립 만세’라고 궁서체로 쓰고 태극기를 그렸다. 권오석은 원장과 어머니께 혼나고서도 잘못했다고 사과하지 않았다. 권오석은 친구 세 명과 ‘애국 소년단’을 조직했지만,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없어졌다.
“솔직하게 말해 보자. 만약 신혜정 선생님이 여자 선생님이 아니라 남자 선생님이었다면 어땠을지 생각해 본 적 있냐?” “아뇨, 그건 아직…….” “그럼 지금부터 생각해 봐라. 자, 눈을 감고.” 정식이가 눈을 감았다. “네가 한 일을 다시 떠올려 보자. 단, 신혜정 선생님 자리에 남자 선생님을 넣어 보자. 가령 나 아니면 최하원 선생님, 아니, 생활지도부의 배 선생님 같은 분으로. 그리고 그 자리에서 네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할지 한번 시뮬레이션 해 보자. 솔직해야 한다.” 정식이의 감은 눈 아래로 무엇인가 영상이 부지런히 돌아가고 있는지 눈꺼풀이 조금씩 움직였다. 눈꺼풀의 움직임은 처음에는 마치 그 아래 두더지라도 지나다니는 것처럼 울렁울렁거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미세한 떨림으로 바뀌었다. 떨림이 점점 커지면서 얼굴 전체가 미세하게 흔들리더니 앞으로 푹 숙여졌다. 그 모습을 다 확인하고 나서 나는 수화기를 들고 생활지도부장 내선 번호를 눌렀다. “교권위 소집할 사안이 있습니다.”(176~177쪽)
6. 자전거 도둑
권오석이 교문 앞을 지나는데 학교 보안관이 어떤 할머니하고 옥신각신하고 있다. 할머니가 자전거를 잃어버렸는데, 그 자전거 도둑이 이 학교 학생이라는 것이었다. 권오석은 1학년 4반 조원익이 범인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조원익의 가정환경, 학교생활, 한글을 읽지 못한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뭔가를 써서 제출하는 과제를 단 한 번도 내지 않았다. 게을러서도 선생을 무시해서도 아니었다. 읽는 것은 마치 단어 전체를 상형문자처럼 꾸역꾸역 읽을 수 있었지만 쓰자고 든다면 이건 너무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 그리기 작업이었던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니, 자전거 도둑을 찾은 것이 오히려 짐이 되었다. 도대체 이 녀석에게 어떻게 길가에 세워진 자전거를 필요할 때 타고 갔다가 집에 가는 길에 도로 갖다 놓는 것이 잘못인지 이해시킬 방법이 없었다.(210쪽)
이 책의 저자는 28년간 교사로 근무한 뒤 1년간 무급 휴직을 하고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학교와 공교육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자녀를 일류 대학에 보내기 위해 초등학교 때부터 명문 학군에 전학시키는 학부모의 교육열, 사립학교 교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뒷거래, 원하는 학교에 진학할 수 없게 만드는 모순된 교육제도, 집단 따돌림을 비롯한 학교 폭력 문제,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명분하에 진행되는 지배 권력의 횡포, 학습 부진 학생 문제가 없는 공교육이 자리 잡기를 희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