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 여유로운 삶의 길잡이
대중교통 이용을 좋아한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운전으로 인한 긴장과 스트레스와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장점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동을 하면서, 음악을 들으며 금융거래를 할 수 있다는 것도 매력이다. 멀리 있는 친구들과 문자로 소통하며, 이모티콘 등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 역시 운전 중에는 누릴 수 없는 재미가 아닌가.
약속이 있어, 시내로 나가던 날이었다. 1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가는데, 필수품처럼 갖고 다니던 이어폰을 소지하지 못했기에 낭패를 당한 것처럼 허전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한 칸씩 건너뛰어 자리를 차지한 승객들 또한 침묵으로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버스가 여자고등학교 앞 정류장에 이르자, 오전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우르르 올라탔다. 몇 명은 빈자리를 찾아서 앉고, 몇 명은 섰다. 쏜살같이 끼어드는 오토바이를 피해 버스가 휘청거리자, 무방비 상태였던 학생들은 합창을 하듯 비명을 쏟아냈다. 그리고는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여기저기서 가볍게 날아다니는 참새들처럼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큼직한 마스크로 입을 가렸으나, 친구들과의 소통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못했다.
무엇이 저리도 즐거울까. 학생들이 버스에 오르지 않았다면, 무거운 침묵은 마치 긴장이 고조된 시험장 분위기 같았을 것이다. 감정도 전염이 된다더니, 버스 안의 분위기는 어느새 왁자지껄 생기로 넘치게 되었다. 소음으로 짜증이 날 수도 있는 일이, 왜 그리도 아름다운 음악으로 들렸는지.
그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코로나19 사태로 누리지 못했던 많은 일들이 지나간 필름처럼 좌르르 펼쳐졌다.
주기적인 두피관리에 파마와 커트로, 성긴 머리카락이 풍성해 보이도록 신경을 써오던 참이었다. 하지만 미용실은 침방울로 감염된다는 코로나바이러스 앞에는 매우 취약한 장소였기에, 발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두 달에 한 번씩 해오던 파마를 반년이 넘도록 하지 못한 것은, 30년 이래 처음 있는 일. 굽실굽실하던 머리카락이 탄성 잃은 스프링처럼 곧게 펴졌다. 그 모습에 익숙해지면서, 미용실을 자주 드나들지 않아도 괜찮다는 사실을 이제라도 알게 되었으니 대견하다고 할까.
시간은 있으나 외출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몸이 아픈 것도 아닌데, 나갈 수 없다니. 일정한 직장이나 예정된 행사가 있다면, 아니 가벼운 약속이라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외출하지 못해 남는 시간은 실내운동과 화초 가꾸기 등으로 바뀌었다. 문화센터 등에서 진행되던 수업이 폐강되고, 모임이나 여행도 자유롭지 못했다. 문화비와 외식비, 교통비가 줄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좀처럼 줄이기 어려웠던 가계비용을 그렇게라도 절약할 수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갈 곳이 있다는 것 또는 할 일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동아리 활동, 친구와 나누던 소소한 수다, 꽃구경 다니던 그날이 그립다. 배낭을 메고 땀 흘리며 걸을 수 있는 날이 다시 올 수 있을까. 그러나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대신한다는 말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암울했던 현실을 이겨내고, 새로움을 향해 관심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사회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일고 있다. 학생뿐만 아니라 기술을 배우는 사람들에게도 동영상 강의가 보편화되고, 화상 회의나 온라인 세미나 등이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을 보면서 '불가능은 없다'는 것을 다시금 느낀다. 반면 코로나19 사태로 세계적으로 무기력과 불안,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이 많다는 보도가 있다. 또는 폭력과 반사회적 행동 등으로 주변을 불안하게 하는 사람들도 있다니,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결과일 것이다.
낯선 환경을 받아들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하루빨리 사태가 종식되기를 바라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적응하기 위해 다양한 도전과 노력을 시도해보는 것이 좋겠다. 익숙했던 것을 말끔히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도 길이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넓고 편안한 마음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다.
세월이 가고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어쩌면 이전에는 미처 몰랐던 것들을 조금씩 깨닫고 풀어나가는 성숙의 과정이 아닌가 싶다. 소음이 음악으로 들리고, 오해가 이해로 바뀔 수 있는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야말로 여유로운 삶의 길잡이가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