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빌리 브란트의 무릎 꿇기와 김정은의 기차 여행
(4) 빌리 브란트의 무릎 꿇기와 김정은의 기차 여행
  • 조신호 기자
  • 승인 2019.03.11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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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에서 비언어적 의사소통(non-verbal communication)이 3분의 2
행동이 보여주는 초언어적 의미 전달이 말보다 더 강한 메시지 가능

 

1970년 빌리 브란트가 무릎 꿇은 모습과 김정일의 기차여행
1970년 빌리 브란트가 무릎 꿇은 모습과 2019년 김정은의 기차여행

사람은 말과 글을 사용하는 만물의 영장이다. 현생 인류, 호모 사피언스는 말과 글뿐만 아니라, 비언어적 의사소통(non-verbal communication)도 하고 있다. 언어학자들은 일상생활에서 비언어적인 것이 2/3라고 한다. 말과 글을 능가하는 초언어적 의미 전달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가장 대표적인 비언어적 의사소통 방식은 신체어, 바디 랭귀지(body language)이다.

아마도 역사상 최고의 바디 랭귀지는 그 당시 서독 총리였던 빌리 ‘브란트의 무릎 꿇기(Kniefall in Warschau)’로 기록될 것이다. 1970년 12월 7일 아침 폴란드 바르샤바에는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빌리 브란트는 40만 명의 폴란드 전쟁희생자 위령탑 앞에 6분 15초 동안 무릎 꿇고 눈물을 흘렸다. 서양문화에서 무릎을 꿇는 것은 신(神)에게 경배하거나 기도로 간구할 때, 그리고 사람에게는 죽여도 좋다고 항복할 때 나타내는 특별한 행동이다. 빌리 브란트가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하는 모습은 감동적인 바디 랭귀지였다. 그 한 순간을 TV생중계로 지켜보던 폴란드 국민들도 눈시울을 적셨다. 참혹한 2차 대전의 가슴 깊은 상처를 치유하는 ‘위대한 무릎꿇기’의 초언어적인 위력이었다. 세계는 브란트 총리의 용기에 박수를 보냈고, 그 다음 해에 노벨평화상을 수여했다. 이러한 화해와 용서는 서독 동방정책의 출발점이 되었고 독일 통일을 이룩하고 유럽 평화에 공헌하는 계기가 되었다. 30년 후 2000년에 그 위대한 모습을 기리기 위해 무릎 꿇고 사죄하는 빌리 브란트의 기념비를 그 부근에 세웠다.

지난 2월 말의 북미 하노이 회담 때 북한 대표단이 선택한 기차 여행은 그 자체가 비언어적 표현이었다. 옥스퍼드 사전에는 이러한 것을 ‘비언어적 시그널(non-verbal signal)라고 했다. 트럼프는 넥타이 차림으로 비행기 타고 하노이에 갔으나, 인민복을 입고 평양에서 하노이까지 기차 타고 간 김정은의 행동은 엇박자 같은 비언어적 시그널이었다. 한국의 언론들은 김정은의 기차 여행을 아버지 김정일처럼 비행 기피증으로, 또는 할아버지 김일성의 이미지 전략 등으로 보도했다.

1958년 김일성은 중국 비행기로 평양에서 베이징으로 이동했고, 베이징 행사를 마치고 광저우까지 중국 기차로, 광저우에서 베트남 비행기를 타고 11월 28일 하노이에 도착했다. 이를 제대로 보도한 국내 언론은 거의 없었다. 이번 일에 김정일의 비행 공포증을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작년 싱가포르 회담에 비행기로 왕복한 것과 같이, 스위스에 유학 생활을 한 김정은에게 비행 공포증은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추측만으로 사실을 오도하는 한국 기자들의 보도를 접하면서 실망감이 컸다. 청와대 행사 기획 자문위원은 이 기차 이동을 “탁월한 선택”이라고 했다. 잘 모르는 말이었다. 세상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안목이 필요하다.

김정은이 4천500㎞를 시속 50-60km 속도로 60시간 넘게 달려서 하노이 동북쪽 163km 떨어진 동당역에 도착한 다음 승용차로 하노이에 입성한 것은 무모한 고집에 불과했다. 비행기로 4시간이면 갈 수 있는데 약 2박3일 간의 기차 여행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또 다시 중국 비행기를 빌려 탈 수 없는 현실적 문제도 있었다. 그러나 애초에 핵무기와 미사일 한 두 개 덜 만들고 전용기 한 대 마련해서 여러 나라와 관계 개선에 힘써야 했다. 김정은의 이번 기차여행을 ‘비언어적 시그널’ 차원에서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이번 회담은 ‘내 방식대로 하겠다.’라는 암시였다. 경제 발전이 급선무인데 핵과 미사일 개발을 고집하는 모순처럼 기차여행 자체가 ‘시대를 역행하는 행동’이었다. 이 특별 열차는 북한의 현 체재를 대서특필하는 길고 긴 현수막이었다. 22량의 객실이 연결된 긴 열차는 사회주의 국가의 선전(propaganda) 방식으로 볼 수 있었다. 김정은과 고위 간부들은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다는 특이한 방식에 흡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4차산업 시대의 국제 관계에 역행하는 행동에 모두가 냉소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동 방법에는 착오가 있었더라도 새로운 역사의 문을 여는 회담을 했더라면 전 세계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을 것이다.

둘째로, 중국의 협력과 지지를 과시하는 시그널이었다. 나의 뒤에는 저 거대한 중국이 있으니 그리 알아라. 회담도 그런 차원에서 진행할 것이다. 2박 3일간 김정은의 기차는 중국 기관차를 두 번 바꾸어가며 운행했고, 통과하는 지역마다 엄격한 통제가 있었다. 특히 도중에 정비하기 위해 멈추었을 때 특별 경계가 삼엄했을 것이다. 그리 쉬운 과정은 아니었다. 각 구간마다 한 달 동안 춘절 이동이 진행 중인 중국 인민들에게 정기 열차 운행을 중지한 불편과 불만이 상당했을 것이다. 중국도 북한을 이용하여 미국을 견제하는 정치적 이득을 노렸기 때문에 이런 무리수가 가능할 수 있었다.

셋째로, 이 기차는 대북 제재로 경제사정이 악화된 북한 내부의 결속을 강화하고 인민들의 충성심을 높이는 메시지를 사용되었다. 빈 손 회담 후, 3월 6일 노동신문 기사를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이번 기차여행은 ‘세계를 진감시킨 2만여 리의 대장정’이었다고 대서특필 했다. 그리고 당과 내각 고위 간부들의 충성을 맹세하는 기고문을 대대적으로 실으면서, ‘인민을 위해서라면 어떤 고행도 달게 여기는 눈물겨운 헌신의 길’이었다고 찬양했다. 조선중앙통신 기사는 “영도자와 인민의 뜨거운 혈연의 정으로 혼연일체를 이룬 주체조선의 국풍을 여러 나라 출판보도물이 널리 소개 선전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북미 하노이 회담의 성과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김정은의 기차여행이 보여준 ‘비언어적 시그널’의 결과는 “경제 발전보다 더 절박한 임무 없다”라는 김정은의 후회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