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세’란 영화가 코로나의 역경을 뚫고 20일에 개봉되었다. 여자주인공 심효정(69)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29세의 남자 간호조무사에게 치욕적인 성폭행을 당한다. 긴 고민 끝에 주인공은 친구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경찰에 신고한다. 하지만 경찰과 주변 사람 모두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주인공 심효정을 치매 환자로 매도하고, 법원의 판사 역시 나이 차이를 근거로 사건의 개연성이 부족하다며 구속영장을 기각한다. 설상가상으로 남성 간호조무사(29)는 합의된 성관계라고 주장한다. 주인공은 가해자가 누구인지 명확한 상황에서 이제 자신이 피해자임을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딱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 영화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폭력 문제 가운데, 사각지대에 놓인 노인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노인여성과 여성을 따로 떨어뜨리고 있는, 사회적 편견을 공론화하여, 노인여성의 명예와 존엄을 지켜내는 일에 그 어떤 차별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여성 69세는 ‘사랑’은 물론이고 '성폭행'도 당할 수 없다는 한국사회의 고정관념과 현실을, 이 영화는 매섭게 질타하고 있다. 더욱이 이 영화는 외면과 곡해 속에서도 사실을 드러내고, 옳음을 밝혀내려는 주인공의 현실 극복기를 끈질기면서도 품위 있게 그려 내고 있다
박범신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은교’가 수년전에 상연됐다. 예상과는 달리 대성황을 이뤘다.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소녀의 싱그러움에 매혹 당한 저명한 시인 이적요(69)와 이 시인을 동경한 열일곱 소녀 ‘은교’ 간의 사랑얘기를 스릴 넘치게 다루고 있다. 서로 갖지 못한 것을 탐하는 두 사람 간의 질투와 매혹을 이 드라마는 그리고 있다. 이 영화는 노시인(老詩人) ‘적요’가 ‘은교’를 바라보는 시선들은 모두 개인적인 사심에 의한 탐욕과 음란함이 아닌, 자신에게는 아직도 순수한 사랑이 충만하지만, 세상 시선의 차가움을 토로하고 있다. 69세의 가슴속에도 젊음과 사랑에 대한 선망과 동경이 자리하고 있음을 넌지시 암시한다. 두 영화 모두 69세가 중심에 놓여있다. 도대체 '69세'란 어떤 사회적 의미를 함의하고있기에, 고개가 가우뚱해진다.
노인의 정의는 현대 문명국가에서는 65세 이상으로 거의 통일되어 있다. 노인을 부를 때 사용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라는 용어도 65세 이상의 노인에게만 붙여야 할 호칭인 셈이다. 65세 이상을 노인으로 정한 것은 1889년 독일의 재상(宰相) 비스마르크가 노령연금을 도입하며 수급 연령을 65세로 책정한 것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이다. 100세 시대에 69세는 중년도 아니요, 그렇다고 노인도 아니다. 그런데도 현실사회는 100년 전의 비스마르크의 정의에 의거하여 노인취급하고 있다. 특히 여자노인은 사랑할 수도 사랑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한국현실은 그들에게 강요하고 있다. 사랑은 나이도 국경도 없다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앞에 두 영화도 이런 시선이 깊게 투영되어있다.
필자는 69세를 ‘오늘’이 아닌, ‘어제’의 관점에서 다시 거칠게 비틀어서 되씹어 보고자한다. 그들은 어떤 시대상황에서 태어나 지금의 69세에 이르렀을까. 앞의 두 영화에 나온 효정(69)과 적요(69)는 똑같이 69세로 '사랑타령'의 주인공으로 상정되었다. 나이와 사랑 간에는 아무런 인과관계가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어쩌면, 이 같은 설정의 저변에는 69세가 지닌 숙명적이고 운명적인 어제의 혹독한 비애를 보상해주려는 의도가 깔린 것이 아닐까? 영화란 아무튼 가공세계를 그리는 픽션이다. 다큐멘터리가 아니란 말이다. 69세 그들 세대에게는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도 없었던 젊음에 대한 선망과 동경을 영화를 통해서라도 보상해주려는 심리 말이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태어난 그들 69세는 따뜻한 사랑이 뭔지도 모르고 이 세상에 던져졌다. 사랑을 갈구하려 이제사 눈을 뜨니, 벌써 69세의 노인이 되어버렸고, 이런 과거를 알고 있는 꽉 찬 바깥사람들에게는 애처롭고 안쓰럽게 비쳐졌을 것이다. 한 세대의 슬픔만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아픔처럼 다가오고 밀려왔기 때문이다.
69세, 그들은 태교(胎敎)가 뭔지도 모르고 태어났으니, 사랑 따윈 알 겨를도 없었다. 오직 죽느냐 사느냐하는 생존이 급선무였으니. 요즈음 ‘태교’에 관한 책이 베스트셀러다. 태교란 임신 후 출산 때까지 태아는 정서적·심리적·신체적으로 모체의 영향을 크게 받으므로, 임신부는 모든 일에 대해서 조심해야 하고 나쁜 생각이나 거친 행동을 삼가며 편안한 마음으로 지내야 한다는 태중교육(胎中敎育)이다. 태교음악을 듣고 자란 아기는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뇌 기능이 발달하며 집중력이 향상된다고 하니 기실 일리가 있어 보인다. 식물도 고전음악과 팝음악에 반응하다고하니 태아에게야 하물며 물어서 무엇하겠냐만.
산모가 태교음악을 정기적으로 듣지 않으면 바보나 지진아를 출산할 것 같은 불안감이 왜 생기지 않겠는가. ‘태담 태교’란 말도 있는데 ‘태담’(胎談)이란 임산부나 남편 또는 그 가족이 태교를 위하여 태아에게 말을 건네는 행위다. 이것은 태교법 중 가장 기본이며 출발점이라고 하나, 이걸 경험하지 못한 69세에겐 그저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문제는 69세다. 6·25전쟁(1950.6.25.~1953.7.27) 와중에 태아였으니 다른 연령대의 세대에 비해 ‘태교’라는 과정이 불가항력적으로 생략되었다. 태담 태교가 차지해야 할 자리에는 총소리와 대포소리가 대신했고, 태담은 고사하고 배속에서 쥐죽은 듯 숨을 내몰아 쉬며 사선을 넘나드는 처지가 되어야만 했다. 애처롭고 안타깝다. 69세는 다른 세대에 비해 정서적으로나 신체적으로 허약함이 뛰 따랐을 것은 명약관화 해 보인다. 전쟁 중에 임신부가 받은 신체적·정신적 피해가 태아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69세들은 1945~1959년에 태어난 비슷한 다른 연령대에 비해 여러 분야에서 정신적 장애나 불편을 갖고 있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고 한다. 어머니들이 임신한 몸으로 전쟁의 참화를 직접 몸으로 겪었기 때문이다.
같은 69세대 중에서는 격전이 벌어졌던 중부지방(수도권·강원도) 출신의 장애비율이 남부지방 출신보다 통계상으로 높게 나타났으나, 반면 1952년생(龍띠)은 전쟁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69세가 태내에 있던 1951년 3월 이후에는 휴전선 인근에서만 전투가 벌어졌고, 그 밖 지역 민간인이 전쟁의 참화를 직접 입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문제는 69세다. 최근 십 여 년 간 여러 명 세상을 떠났다. 죽음은 전문직이며 사업가 자영업을 가리지 않고 찾아왔다. 중학교 입학시험에는 국어, 산수, 주판 그리고 체육시험을 치렀다. 달리기와 턱걸이 그리고 멀리 뛰기 종목을 들어갈 정도로 69세의 체력은 국가적 관심 사안이 되었다. 뚱뚱한 사람이 대접받던 시대였다. 당시 우량아 선발대회의 인기는 실로 대단했다. 워낙 가난한 시대였기에 뚱뚱한 사람은 모두 건강하며 부자라는 인식이 강했던 시대다. 그래서 우량아 선발대회에서 뽑힌 ‘우량아기’는 그 시대에 선망의 대상이자 로망이 되기도 했다.
생존하고 있는 69세들이여, 그들을 잉태한 상태로 전쟁의 참화를 직접 겪었을 어머니들에게 무한한 감사와 고마움을 잊지 말지어다. 임신한 몸으로 전쟁을 피해, 머리에는 옷가지를 이고, 등 뒤에는 쌀 포대기를 짊어진 어머니들의 모습을 상상하자니 벌써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대 이름은 여자가 아니라 어머니이기에 가능한 일이요, 인간이 아니라 哲人이기에 가능했으리라. 배속의 태아는 태교(胎敎) 대신에, 대포소리와 총소리로 몸서리를 쳤을 것이다. 그들이 오늘의 69세다. 영화 속 이런 대사가 그들에게 위안이 되길 바랄 뿐이다. “너희 젊음이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이,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