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세월 사랑과 우정을 위해 존경으로 섬길 터
'내 친구는 내 배우자’라는 제목으로 먼 길을 오셔서 우리 부부의 삶을 글로 싣게 해주신 시니어매일에 우선 감사드립니다. 친구는 ‘오랫동안 가깝게 사이좋게 지낸 사람’이란 뜻이고, 배우자는 ‘부부의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서로 살펴보며 살아온 사람’이라는 뜻으로 우리 부부가 ‘친구같이 서로를 살펴주며 살아온’ 모습으로 보인다고 하시니 쑥스럽기만 합니다.(웃음)
- 두 분의 인연에 대해
▶저는 대구 남산동이 고향이고 아내는 의성 탑리 출신으로 두 집 모두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어머니와 장로님의 주선으로 인연을 맺었습니다.
연애 반 중매 반으로 사랑을 키워오다 1980년 4월 말 결혼하면서 아내는 남산동 본가에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저는 경찰 공무원으로 지방에 근무하던 중 이듬해 10월 서울에 정착하여 40여 년을 서울 관악구에 살고 있습니다. 그 시절 ‘신림1동 1626번지의 동네’에 살던 이웃 분들도 아이들의 화목한 어울림 같이 ‘시골스러움이 넘치는’ 소박함과 순수함, 인정의 훈훈함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성탄절은 물론, 교회 여름 성경학교와 연말의 선교원 학예회 등 행사가 아이들의 즐거움에서 어른들에게로 이어지면서 모두가 함께하는 동네의 축제 분위기로 넘쳤습니다.
- 슬하에 자녀는 몇 분이신지?
▶제가 복이 없어 그런지 아들은 없고 딸만 셋 입니다...(웃음) 오히려 복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출가해서 각자의 영역에서 열심히 잘 지내고 있으니까요. 아내의 헌신적인 희생으로 값진 결과를 이룬 것이라 항상 미안함이 남아 있습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마칠 무렵에는 학원비를 벌기 위해 구민회관 식당에서 일하고 저는 박봉의 가장이지만 가족을 위해 제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열심히 했었지요. 교회에서 많은 성도들이 식사를 할 경우 아내의 역할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저런 고단함이 몰려올 때는 자식들이 성장하여 꿈을 이루는 상상으로 기쁨을 새기며 피로를 풀기도 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헌신적인 가족 사랑이 남다른 아내였지요. 현재 장녀는 의사, 차녀는 하버드 졸업 후 신학박사로 활동, 삼녀는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 신장암 3기 투병을 하셨는데 아내로서 당시 심정은?
▶10년 전이니까 당시에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그냥 주저앉고 싶었어요. 이대로 기둥이 무너지면 안 된다는 생각 밖에는 달리 생각나는 게 없었어요. 눈물도 사치 같아서 울 시간도 없이 병원에서 며칠 뒤 수술을 하고 나니 그때서야 앞이 보이더군요. 밤낮으로 기도에 매달리며 간절한 소원을 빌었습니다.(눈시울이 붉어져...잠시 중단)
생사를 오가는 시간 속에 10일간의 입원이 10년 같은 느낌으로 24시간 간병 속에 회복의 기미가 보이는 남편의 미소에서 저에게 미안함이 역력히 묻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더구나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라 표현은 어려워도 심성이 고우니 얼굴에서 표시가 나지요.
‘저는 그 당시 아내의 애절한 기도와 헌신이 없었다면 이 자리에 없었을 겁니다.’ ‘저 역시 눈만 뜨면 기도를 하면서 두려움과 고독에서 벗어나려고 집중을 했었지요.’ 다행스럽게도 신의 가호로 병세가 호전되어 퇴원 후 통원치료를 받던 중 이듬해 7월 검사에서 ‘이제 암 병동에 오지 않아도 된다.’ 는 기쁜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환희 속에서 ’남을 위한 축복의 기도를 해야 한다‘ 는 다짐을 했습니다. 그 이후 행동하는 축복의 기도사역을 하며 지냈는데 일상이 항상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내가 나의 보호자요 친구로 변신하는 아름다운 순간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나는 아기가 되고 아내는 엄마가 되는 새로운 삶 속에서 기쁨을 얻었고 항암투병에서 잊지 못할 고통을 글로 전부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고통의 연속에서 기쁨과 환희로 변한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며 나는 사랑을 아내는 우정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 육개장 음식 솜씨에 부인 자랑을
▶음식은 제 입에 맞으면 누구라도 엄지손가락 올려주잖아요 그런 의미인데 유독 아내가 1박2일이나 집안 행사 기타 외부 일로 며칠 집을 비울 때는 혼자서 식사하기 적적하니까 꼭 육개장을 해 놓고 간단하게 데워서 먹으라고 하는 겁니다. 그것은 장모님의 솜씨를 이어받은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장모님 육개장 솜씨는 다른 분들도 감탄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니까요. 더구나 제가 수술 후 육식을 전혀 못 할 때는 산나물 구입을 위해 강원도 정선, 충북 제천, 경북 영양 등 산골마을을 다니면서 제 건강 회복을 위해 먼 길을 마다 않고 가져온 산나물을 먹고 이렇게 회복한 몸인데 이제는 제가 아내의 건강을 보살펴야 할 시간이 됐습니다. 담당 의사도 육식을 좋아하던 분이 채식을 하면서부터 면역이 강해졌다고 하니 자연식의 대단함에 감탄과 놀라움을 잊지 못합니다.
- 두 분의 건강관리에 특이점이 있다면?
▶매일 관악산 산책길 만보를 목표로 같이 다니고 있습니다.
더구나 피톤치드가 많이 발생하는 시간이 11시~2시 사이라고 하니 시간 맞추어 다니면서 둘 만의 추억을 쌓고 있습니다. 함께 해주는 것도 아내를 떠나 친구끼리 우정을 더욱 깊게 다지는 시간이 되기도 하지요. 또한 교회봉사는 물론이고 각종 사회 모임봉사도 열심히 다니고 있습니다. 기도생활과 절제된 음식, 일정한 운동으로 관리하고 특히 피아노 연주의 대명사 막심 므라비차의 왕자의 게임 연주를 동영상으로 들으면 아주 상쾌한 기분을 유지할 수 있지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크로아티아 출신인데 신이 주신 손가락이라고 합니다. (동영상 틀어주심...경쾌한 선율) ‘큰 딸이 선물한 CD를 자주 듣고 있는데 멋진 연주 아닙니까?’ 정서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는 피아노 연주인데 치매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떤 형태라도 건강한 몸과 정신을 유지해야 되니까요.
- 젊은 나이 때 부부가 친구로 생각했다면?
▶말이 친구지 우리나라는 유교사상이 깊어서 남편이 아내를 낮추어 보거나 지시를 하려는 경향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세상이 변했지만 앞으로는 그렇게 흘러갈 것이라 봅니다. 그게 맞다고 생각되는 게 집안 일은 분담을 하고 아내가 하는 일 90% 이상을 남편이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더욱 깊은 사랑과 정을 맺을 수 있고 가정과 가족의 소중함을 몸소 챙기다 보니 이혼이라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시대가 올 거라 확신합니다. 서로가 이기려고만 하니 의견 충돌이 자주 일어날 수밖에. 부부가 서로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배려한다면 더 이상 뭘 바라겠습니까?
- 시니어 세대를 사회에서 보는 다양한 시각에 대해
▶누구나 생로병사를 반드시 맞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면서도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분명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당연한 듯 다가오는 나의 삶을 안다면 즐겁게 맞이하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저 역시 이제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기도생활이 주는 힘이란 것은 체험하지 않으면 이해가 어렵습니다. 그 체험을 한 번이라도 경험한 분들은 감사하고, 즐겁게, 웃으며 생활하고 있지요. 그러니 고령층이니 늙었다느니 등 생각하지 말고 스스로 나보다 남을 위한 생활을 해보시길 권합니다. 그러면 본인이 어떤 형태든 느끼게 되고 생활이 변하고 자신이 변한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게 큰 기쁨이고 인생의 참 맛을 느끼는 순간이라 생각합니다.
- 끝으로 좌우명 있으시면?
▶ ‘평안과 기쁨으로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누구든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고맙습니다.
두 분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 드리며 바쁘신 중 반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관악산 입구 카페의 커피향이 오늘따라 진하게 스며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