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때 최초 참가한 의승군 700∼800명이 이곳에서 훈련
조각승 청허의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보물 제1750호
명부전의 수미단 기린 등 독특한 이중 투각기법 사용 고도의 조각기술
천 년 맺힌 시름을 출렁이는 물살도 없이
고은 강물이 흐르듯 학이 난다.
천 년을 보던 눈이 천 년을 파닥거리던 날개가
또 한 번 천애(天涯)에 맞부딪노나.
산덩어리 같아야 할 분노가
초목도 울려야 할 설움이 저리도 조용히 흐르는구나.
보라. 옥빛. 꼭두서니. 보라. 옥빛. 꼭두서니.
누이의 수(繡)틀을 보듯. 세상을 보자.
누이의 어깨 넘어 누이의 수틀 속의 꽃밭을 보듯
세상을 보자.
울음은 해일(海溢). 아니면. 크나큰 제사(祭祀)와 같이
춤이야 어느 땐들 골라 못추랴.
긴머리. 잦은머리. 일렁이는 구름속을
저 울음으로도. 춤으로도. 참음으로도 다 하지 못한 것이 어루만지듯
저승길을 난다. (학(鶴) 서정주)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木造釋迦如來三尊坐像)은 항마촉지인을 한 목조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좌상이 협시하고 있는 삼존불이다. 1644년(인조 22)에 영규(靈奎)대사가 중국 흑룡강에서 은행나무를 구하여 조성했다. 크기는 주존불의 높이 158㎝, 좌우 협시보살의 높이 126㎝이다.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은 등신대의 크기에 위엄과 온화함을 갖춘 얼굴, 작은 이목구비, 균형 잡힌 비례와 간결한 옷주름에서 17세기 전반기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활동했던 청허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는 작품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2년 2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에서 보물 제1750호로 승격됐다.
1990년에 경산 남천 출신 재윤(在閏)스님이 대웅전을 해체 복원하고 요사 1동을 보수하면서 개금불사 시 대웅전 불상의 복장(腹藏)에서 사적기가 발견되었는데, 여기에 따르면 1635년부터 선승들이 동학산(動學山) 남쪽 기슭에 새로운 사찰을 창건하고자 도모하였고, 1644년 영규(靈圭)에 의해 경흥사가 중건되었다고 한다. 같은 해 수화원 청허(淸虛)를 비롯해 영색(英賾), 현욱(玄旭), 정혜(淨惠), 신웅(信雄), 나흠(懶欽), 영이(榮伊) 등 7명의 조각승이 석가삼존상을 조성했다. 4∼5개의 부속암자가 있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전만 하더라도 현재 가람의 동쪽을 중심으로 수십 명의 학승들이 상주하던 큰 가람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명부전에는 옛날 대웅전으로 쓰던 때부터 사용하던 수미단을 그대로 두고 압량 부적리 삼룡사에 있던 지장보살상을 봉안하고 있다. 17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수미단은 현재 온전한 상태가 아니라 잔존 부재가 일부 삽입되어 있는 상태이다. 비록 잔존하는 양이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앞뒤로 뚫린 투각기법을 사용하고, 뒷면에도 칼질을 해서 투각자체가 이중으로 보이게 하는 이중투각기법을 사용하여, 다른 사찰 어디에서도 볼수 없는 고도의 기술이다. 그 조각기법이나 솜씨, 조각의 구성과 배치가 매우 우수하여 2009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55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명부전·독성전·자미전·산령각·종각·강학당·심우당 및 요사 등이 있다. 1996년에는 대웅전과 명부전, 요사 등 건물 5동을 단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산시 남천면 산전리 동학산자락 깊숙이 자리한 경흥사는 병풍산 등이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어 일단 안으로 들어가면 외부와는 단절된 듯한 느낌을 준다. 절 옆으로 흐르는 개울과 절앞으로 흐르는 계곡이 이곳에서 합수하여 수량이 풍부하다. 이러한 자연지리적 조건때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초의 의승군(義僧軍) 700∼800명이 이곳에서 최초로 훈련을 받고 전쟁에 참가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서산대사와 사명당이 머물렀다는 설도 있다.
최초 승병을 이끌고 임진왜란에 참가한 영규대사는 충청도 공주 계룡산 아래에서 태어나 조국이 풍전의 등불과도 같은 위기에 있을 때 서산대사, 사명대사와 함께 의병 승군을 일으켜 훈련을 시키던 의병승장이었다. 관군과 더불어 청주성을 점령한 왜군을 공격하고, 다시 조헌(趙憲), 중봉(重峯)과 힘을 합쳐 청주성을 탈환한 후, 1592년 8월 18일 조헌과 함께 금산성 전투에서 최후까지 왜군과 맞서 호남 침공을 저지했다. 그러나 부상을 입고 그 해 8월 20일 숨을 거두었으며, 영규대사의 죽음이 전국에서 승병이 궐기하는 도화선이 됐다. 승려의 몸으로서는 유일하게 그 무덤이 남아 있다.
경흥사 서북쪽 20~30m 지점의 남서쪽 계곡에 20~30평 정도의 노천탕지가 있다.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 매일 목욕을 하고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지만 당시 승려들의 심신수련지로 보인다. 경흥사는 승군의 본거지였다는 이유로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명부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파괴됐다. 일제 시대에도 명부전 뒷벽에는 일본의 국가 문장을 그려넣어 일본을 경배하라는 수난과 아픔을 겪었다.
경흥사에는 예로부터 부도가 많아 경내 동쪽의 구릉지를 지금도 부딧골이라고 부른다. 이곳에는 한때 경흥사에서 수행한 옛 스님들의 부도 36기가 보존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부딧골 일대를 황폐지로 만들면서 부도들을 200~300미터 아래의 계곡으로 밀어냈다. 광복 이후 신도들이 그중 일부를 수습해 부도 6기와 깨진 비석 조각 1기를 봉안해 경내 우측 산자락 아래 높은 지대에 모셔놓았다.
신비의 돌이라 불리는 맥반석은 일명 보리밥돌이라고도 하는데 돌덩이에 보리밥알 같은 모양과 크기의 하얀 반점이 안팍으로 촘촘히 박혀 있는 돌이다. 국립지질조사소에서 발행한 지질도에 의하면 이일대에 백악기에 형성된 안산반암(일명 맥반석)이 약 300만평(1,000만㎡)의 면적에 무한정으로 매장되어 있다고 표시되어 있으며, 지금도 계곡바닥에 많이 있다. 인근에 조선 태종 때 맥반석으로 궁중에 사용하는 그릇을 제조한 분청사기요지터가 남아 있어 1982년 경상북도 기념물 제40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가는길은 경산에서 청도방향으로 국도 25호선을 타고 가다 구 석정온천을 지나 1㎞ 정도 진행하면 이정표(대명1리, 산전리)를 따라 내려간다. 바로 좌회전하여 남천제방을 따라 200m 정도 지나면 대명교 다리가 나타난다. 다리를 건너 농협하나로마트앞에서 왼쪽 경흥사 이정표를 따라 제방도로를 계속 타면 대명1리 마을을 지난다. 작은 다리에서 정면(서쪽) 철길을 바라보고 달리면 경부선 철교 지하도를 지나고 계곡을 따라 계속 가다보면 경흥사삼거리 갈림길이 나타난다. 왼쪽은 모골 골짜기로 가는길이고, 분청사기 가마터도 산기슭에 있다. 오른쪽 절골로 접어들어 0.5㎞가면 신라 고찰인 경흥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