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적들은 이 사태를 의상대사의 기기묘묘, 신기막측의 도술이라 여겼다.
수의는 저승길의 나들이옷이며 복을 짓는 옷이며 꿈을 꾸는 옷이다.
평소 마음에 들어 이거다 저거다 싶었지만 오늘 다시 보자 왠지 허접스럽고 싸구려인 듯 보여 벌레 먹은 낙엽처럼 바람구멍이 숭숭하다. 이곳을 기웃, 저곳을 기웃 부질없이 시간만 지체한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싶어 몇 가지 물품을 급하게 흥정하여 나는 듯이 돌아왔지만 인적이 끊어진 집 안 밖이 썰렁하다.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의상대사에게 전하고자 준비한 법복(法服)과 집기(什器)등을 넣은 상자를 양손으로 받쳐 들고는 신발이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항구로 달린다.
그런데 항구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와 웅성거리고 섰다.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무슨 일이냐고 묻자 배가 뜨자마자 풍랑이 일더니 급기야 수평선으로 향하던 돛단배가 사라져 보이질 않는단다. 선묘낭자 또한 별다른 대책이 없어 함께 발만 동동 구른다. 한참을 발만 구르며 원망스런 눈길로 바다를 바라다보던 선묘낭자는 의상대사에게 공양하려고 극진한 정성으로 준비한 기물상자를 배를 향해 바다에 던지고는 “이 몸이 죽어 한 마리 청룡이 되어 저 배를 보호케 하소서!” 합장 후 바다에 몸을 던진다. 그러자 놀랍게도 바다 속에서 한 마리의 청룡이 나타났고 거짓말처럼 풍랑이 가라앉는다. 이후 용으로 변한 선묘낭자는 의상대사가 신라 땅에 도착한 뒤에도 호위병을 자처한 듯 암암리에 뒤를 따른다.
그 덕택으로 무사히 서라벌에 도착한 의상대사는 왕명으로 전국 각지를 돌면 사찰을 세우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영주 땅 봉황산(鳳凰山: 경상북도 영주시와 봉화군에 걸쳐 있는 산) 아래에 이르러 최고의 길지를 찾아내니 지금의 부석사 자리다. 하지만 당시 그곳에는 500여 명의 산적이 살고 있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의상대사가 아니다. 혈혈단신으로 도적의 소굴을 찾은 의상대사는 사찰을 창건할 자리라며 양보를 권하며 금과옥조와 같은 법문을 설법하고 이해를 구해도 도둑들에게는 한낱 소귀에 경 읽기와 같다.
결국 의상대사는 요사스런 인간으로 취급받아 사로잡히고 만다. 그런 가운데 진정 부처님의 제자라면 천축을 다녀온 삼장법사(본래는 현장법사로 인도에서 삼장(법, 율, 론)의 법문을 들여옴으로써 삼장이라 부른다)와 손오공, 저오능(저팔계), 사오정과 같은 신통한 도술을 강요받는 등 온갖 수난 끝에 사형의 위기에 처해진다.
사람의 목숨이 걸린 문제, 도적의 괴수라고 그 결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신라는 527년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를 국교로 공식 인정했다. 이후 150여년이 흘렀다. 따라서 국교로 지정된 불교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라에서도 인정하고 민간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퍼진 불교를 그 또한 어찌 모르겠는가? 하지만 그에게는 딸린 식솔들이 500여 명이나 된다. 한 번의 판단 미스가 그들의 목숨을 위기로 몰고 가는 것이다. 그때 그는 그의 요구대로 의상대사가 간단한 기적이라도 보여주었으면 했다. 그도 아니면 차라리 동전숨기기 같은 간단한 마술 하나라도 보여주었더라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이도저도 없이 주구장창 알아듣지도 못하는 불경만 외울 뿐이다. 결국 심복들과 의논한 결과 의상대사는 관부의 끄나풀로 오인되었고 도적의 괴수는 어쩔 수 없이 사형이란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 것이다.
사형 당일 오전나절, 널따란 광장으로 사람들이 운집할 때 높다란 축대 위에서 호피가죽으로 치장한 의자에 거만스런 자세로 도적의 괴수가 화려하게 치장한 여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덩그렇게 앉았다. 그 아래의 넓은 공터 한 중앙으로 굵직한 나무기둥이 세워지고 소 힘줄로 만든 밧줄로 의상대사가 꽁꽁 묶였다. 그 앞으론 회좌수인 듯 기골이 장대한 사내가 시커먼 상판대기에 매부리코가 우락부락하고, 수염은 장비를 닮은 듯 뻣뻣한 것이 시퍼렇게 날이 선 커다란 칼을 꼬나들고는 우뚝하게 섰다. 또 그 뒤로는 궁수가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에다 살을 메겨 대기 중이다. 아마 회자수는 분위기 메이커로 바람을 잡는 중이며 실제는 총살형처럼 궁수가 뒤를 책임지는 형국이다.
바람 앞에 등불 같은 신세가 된 의상대사, 도적놈 괴수의 손끝에 모든 운명이 달렸다. 초조한 시간은 점점 흘러 땅에 꽂은 막대기의 그림자가 정오에 겹치려는 찰나 하늘을 힐끗 쳐다본 도둑놈 괴수의 손이 하늘을 향한다. 때를 같이하여 의상대사 앞에 꼿꼿하게 섰던 사내가 커다란 칼을 장난감처럼 빙빙 돌리며 미친 듯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이제 하늘로 치솟은 손만 내려지면 한 생명의 꿈과 희망이 물거품이 되려는 찰나다. 숨을 죽인 졸개들마저 이 조마조마하고 살풍경한 순간을 마른 침을 “꼴깍”삼키며 중인환시다. 햇빛마저 분위기에 녹아 든 듯 터질 듯 팽팽하다.
“으~ 음”하는 목구멍을 긁어내는 신음소리 같은 암울한 단발마가 도적놈 괴수의 입에서 튀어나오고 손끝이 파르르 떠는 찰나였다. 바로 그 순간 섬광이 번쩍거리고 지축을 흔들 듯 천둥이 일더니 난데없는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소낙비가 콩을 볶아내는 소리를 내지르며 세차게 내린다. 그 바람에 주위는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어느 틈엔가 하늘로부터 청룡 한 마리가 나타나 사지로부터 의상대사를 구출한 뒤 사형장을 휘둘러 난장판을 만들어 버린다. 일다경(차 한 잔을 마시는 시간으로 약 15분정도)이나 지났을까? 청룡은 모든 도적들을 한 곳으로 몰아서 꼼짝달싹 못하게 가두어 버린다.
도적들은 이 사태를 의상대사의 기기묘묘, 신기막측의 도술이라 여겼다. 이후 그들은 의상대사의 바람대로 도적놈의 괴수를 시작으로 모두 머리를 깎고는 출가, 모조리 중이 된다. 500여 명이란 많은 인원이 출가하여 스님의 신분으로 사찰 건립에 온힘을 보태자 공사는 순조로웠고 마침내 부석사가 창건된다.
이후 선묘낭자는 바위로 변했다는 설과 부석사의 수호신을 자처하며 땅속으로 들어갔다는 설이 전한다. 지금도 부석사의 무량수전(無量壽殿)뒤에는 부석(浮石)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가 선묘낭자가 용으로 변화했던 바위라고 한다. 수호신에 대해서는 일제강점기에 이 절을 개수할 때 거대한 석룡의 일부가 땅 속에 묻혀 있는 것이 발견되었으며, 자연적인 용의 비늘 모습이 있었다고 한다. 석룡은 절의 창건과 관련된 것으로 현재 무량수전 밑에 묻혀 있는데, 머리 부분은 아미타불상 바로 밑에서부터 시작되며, 꼬리 부분은 석등 아래에 묻혀 있다고 한다.
창건 후 의상은 이 절에서 40일 동안의 법회를 열고 화엄의 일승십지(一乘十地)에 대하여 설법함으로써 이 땅에 화엄종을 정식으로 펼치게 되었다. 특히, 의상의 존호를 부석존자(浮石尊者)라고 칭하고 의상의 화엄종을 부석종(浮石宗)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모두 이 절과의 연관에서 생겨났다.
부석사의 창건과 관련하여 모든 행사가 끝나 조용한 시간을 택해 의상대사는 지금껏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을 조용히 되짚어 보고, 이 모든 조화가 선묘낭자의 희생에서 비롯됨을 알고, 그녀의 숭고한 정신을 기억하고자 작은 사당을 만드니 무량수전 바로 옆의 선묘각이다.
몇몇 사람들이 무량수전의 축대에 걸터앉아서 부석을 바라다보고 있다. 한갓진 표정에 여유가 넘쳐난다. 서산으로 기우는 태양만이 제 할 일을 다 하려는 듯 그림자를 길게 끈다. 사람들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염원하고 있을까? 다 평안하고 고요한데 나만 욕심이 지나쳐 허공을 움켜쥔 손처럼 어지럽고 혼탁한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문득 부석의 바위는 엎어진 걸까? 아니면 누워 있는 걸까? 엎어지면 어떻고 자빠지면 또 어떤가? 원래부터 그 자리가 그 자리가 아닌가?
부질없는 발걸음이 왼쪽으로 난 오솔길로 접어들자 작은 바위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거무튀튀한 이끼를 뒤집어 쓴 그저 평범한 바위다. 둥그스름한 것이 음전한 듯 무던하다. 아마 겁(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긴 시간을 가리키는 불교용어. 겁파(劫波)로써 큰 바위를 1백년마다 한번 씩 비단 옷자락으로 닦아서 그 바위가 다 닳아 없어질 만큼의 시간을 말하며 여기서 큰 바위라 함은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1유순((由旬: 고대 인도의 이수(里數) 단위. 소달구지가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로서 80리인 대유순, 60리인 중유순, 40리인 소유순의 세 가지가 있다)의 시간 속에 모서리를 내어주고 또 내어주고 본래부터 내 것이 아니다 다 내어주고 이끼를 수의(壽衣사람이 죽어 염습(殮襲)할 때 시신에게 입히는 옷 또는 죽은 사람에게 입히는 옷)로 삼아 자연으로 돌아가려 준비 중인 모양이다.
그런데 그 수의가 너무 무거워 보인다. 투덕투덕 덮은 검은 이끼가 수의라서 무거운 것만은 아니다. 수의는 저승길의 나들이옷이며 복을 짓는 옷이며 꿈을 꾸는 옷이다. 따라서 인생의 가장 아름다웠던 때를 기억하는 옷, 저승에서 만날 사람에게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옷이면 충분하다. 그런데 그 수의 위로 속세에 대한 삶의 무게가 덕지덕지 붙었다. 십 원짜리, 백 원짜리, 오백 원짜리, 물을 건너 온 듯 출처를 알 수 없는 동전들로 빼곡하다. 사바세계의 근심걱정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 듯하다. 사람마다 각기 품은 생각이 다르고, 원하는 바가 다르고, 희망하는 바가 다르듯 저 많은 동전들이 품은 사연도 각양각색으로 다를 것이다. 저 소원을 다 이루려면 바위는 또 억겁의 시간이 지난 후에도 쉽게 잠들지 못하리라! 무량수전에 든 아미타불이 “사람들 모두가 부처가 되기 전에는 결코 성불치 않으리라!” 한 뜻처럼, 그래선지 무량수전의 아미타불은 건축물의 구조와 배치를 고려하지 않고 동쪽을 향해 앉았다. 이곳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의 근심걱정이 모두 사라지는 그 날을 초연히 기다리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