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이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창세기 32장 25절)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창세기 32장 28절)
저건 피겨스케이팅이다. 18세기에 이 정도의 피겨스케이팅이 유행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도나토 크레티의 이 그림은 피겨스케이팅의 프로그램 구성자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으리라. 파트너를 번쩍 들어 올리는 순간 남자의 근육은 요동치고 그 서슬에 옷자락도 출렁출렁 펄럭였을 것이다. 파트너를 들어 올리는 순간 파트너의 몸은 활처럼 휘어졌을 것이고, 그 바람에 긴 허리띠가 몸의 동선을 따라 둥근 원을 그렸을 것이다. 프로그램 구성자들은 크레티의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을 빙상 위에 재현시키고자 했으리라.
크레티 역시 폴라이우올로의 ‘헤라클레스와 안타이오스’를 차용하여 이 그림을 그렸다. 노성두 님의 <전국을 울린 화기들>에서는 이에 대하여 인상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인간의 육체적 긴장이 얼마만큼의 극한점에 도달할 수 있는지 실험하기 좋아했던 폴라이우올로는 근육과 힘살의 터질 듯한 부대낌을 조형적 재현의 긴박한 구도로 삼았다."
그의 지적대로 폴라이우올로는 조이는 자와 조임을 당하는 자의 근육의 역동성에 초점맞점이 이러함었다. 그러나 크레티는 폴라이우올로를 차용하면서도 천사와 야곱의 씨름에 자신의 안목과 혼을 담아내었다. 천사와 야곱의 씨름은 힘의 대결이라기보다 정신의 대결이다. 근육을 역동적으로 작동시킬 이유가 없는 대결이라서 그 근육미보다 피부미를 살려서 천사나 야곱의 살은 부드럽고 유연하다. 전자가 근육의 역동적 표현이라면, 후자는 행위의 역동적 표현이다. 전자는 생사를 건 결투인데 비하여, 후자는 아름다운 한 바탕의 춤사위이다.
야곱이 얍복 나루에서 하룻밤을 머무르게 되는데, 그날 밤에 천사를 만나 씨름하다가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는 사고를 당한다. 그러함에도 야곱이 천사를 놓아주지 않자, 천사는 비로소 야곱에게 축복을 내린다. 야곱은 형 에서에게 장자권을 산 욕심 많은 사람답게 이 대목에서도 천사에게 축복을 받아내려는 욕심을 드러낸다. 어쨌든 하나님의 사자인 천사로부터 축복을 받음으로써 이제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새 사람, 이스라엘이 되었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자, 얍복 나루에 동이 틀 무렵까지 씨름은 끝나지 않았다. 여명이 먼 산 너머에 머물 즈음에 양들도 잠에서 깨어 어둠을 털어내고, 씨름도 마침내 막바지에 이루고 있다. 날개를 활짝 펴서 승전을 도모하는 천사는 손을 들어 야곱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내린다. 왼손을 감아줘 야곱의 팔목을 쳐서 이제 몸을 풀라고 명하고 있다. 천사는 고개를 들어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야곱은 그런 천사를 우러러보고 있다.
청년 야곱은 힘살이 좋아 젊음이 넘치는데, 천사는 아직 어린 티를 벗어나지 못한 미소년이다. 몸도 남성이라기보다 여성에 가깝다. 근육을 이루는 선이 미려하다. 드러낸 가슴이 아니면, 여성으로 보아도 됨직하다.
욕심 많은 한 인간의 모습을 이토록 아름다운 미학으로 해석해낸 이면에는 한 예술가의 창조적 감정이 얼마나 진하게 녹아 들었을까? 그것이 욕심일 망정 몸을 던져 이루고자 할 때, 그 모습은 얼마나 아름답게 보이는가, 하나님이 예비한 사건임에랴.
나는 한 예술가의 눈을 통하여 재현한 한 폭의 그림에서 야곱의 아름다운 욕심을 보았다. 그림 속에서 얻은 감동을 갈무리해 두기 위해 나는 오랫동안 이 그림과 씨름하였다. 그리고 기억의 곳간에다 그 감동을 채워 넣느라. 나는 욕심을 다스리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