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창] '1월'은 야누스의 얼굴이다
[인문의 창] '1월'은 야누스의 얼굴이다
  • 장기성 기자
  • 승인 2021.01.21 10:00
  •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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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 가운데, 멋없고 싱거운 달이 어디 있겠는가. 모든 달이 자신의 색깔과 향기로 무장한 재간둥이요 멋쟁이들이 아니던가. 그래도 자존감과 존재감이 떨어지는 달을 꼽으라면 1월이다.
로마 신화에서 야누스(Ianus)는 1월을 뜻하는 영어 ‘January’이다. 야누스는 한 해가 끝나고 다른 한 해로 들어가는 문(門)을 의미한다.
로마 신화에서 '야누스'(Janus)는 '1월'을 뜻하는 영어 ‘January’의 어원이다. 그래서 야누스는 한 해가 끝나고 다른 한 해로 들어가는 문(門)을 의미했다. 위키백과

누가 뭐래도 ‘1월(January)’은 야누스의 얼굴과 닮았다. 한 해 가운데, 멋없고 싱거운 달(月)이 어디 있겠는가. 모든 달이 자신의 색깔과 향기로 무장한 재간둥이요 멋쟁이들이다. 그래도 자존감과 존재감이 떨어지는 달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1월이다. 1월에겐 염치없지만, 12월이 가진 잔상의 그림자가 1월에 깊게 드리워져 설 자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12월 달력엔 스케줄로 꽉 차서 허접한 날이 하루도 없었지만, 1월은 온통 텅 비었다. 그런들 어찌 하겠는가. 1월은 12월을 향해 애잔한 손길을 내밀지만 12월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어찌하면 좋을꼬. 그렇다고 지나간 모든 달이, 회한이 되고 미련으로 남는 건 물론 아니다. 계절의 여왕 5월이, 지나간 4월에 어떤 미련을 갖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내 의식세계가 나를 알아차리기 시작할 무렵부터, 12월의 하루하루는 초조함과 긴장감이 겹쳐져 아쉬움이 고이는 달이었다. 꽉 찬 회한들로 하루하루를 허기 속에 허우적대지만 내색하지 않고 내색 할 수 없는 달이 바로 12월이었다. 아쉬움은 모자람의 또 다른 이름 이기는 하나, 채움을 향한 또 다른 심쿵이 아니겠는가.

1월의 시계 초침은 왜 그리 꼼짝하지 않고 미적대는지, 제대를 앞둔 병장의 모습과 흡사하다. 포만과 만용이 도처에 널브러져있다. 그러니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지나간 12월에 곁눈질하며 눈길이 맞닿기를 바라는지 모른다. 몸은 1월에 마음은 12월에 놓여있으니 야누스와 꼭 닮았다. 한 몸에 두 얼굴을 한 야누스 말이다. 결혼한 사람이 부인을 옆에 두고 첫사랑에 목매이는 꼴이다. 

‘1월’을 뜻하는 January는 로마신화의 신 ‘야누스(Janus)’에 어원을 두고 있다. 야누스는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로 알려져 있듯, 신화에서 신전 출입문을 지키는 ‘문지기’라니 제격이다. 몸통 하나에 두 얼굴을 가졌으니 충직스런 문지기의 표상이 될 듯도 하다. 물샐틈없는 경계가 가능했으리라. 그래서 몸은 하나지만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의 표상이 된지 오래다. 본래는 1월이 '수호신'이라는 긍정적인 뜻을 가졌지만, 세월을 지나오면서 두 얼굴을 가진 겉과 속이 다른 사람으로 묘사되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그냥 '이중적 인격자'로 낙인 찍혀버렸으니 야누스가 살아 돌아온다면 억울하여 화날 만도 하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07년6월 12일 '수용소 군도' 로 1970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반체제 작가'의 대명사 알렉산드르 솔제니친(89)의 자택을 방문해 '러시아의 현재와 미래'를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07년6월 12일 '수용소 군도' 로 1970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반체제 작가'의 대명사 솔제니친(89)의 자택을 방문해 '러시아의 현재와 미래'를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위키백과

솔제니친(1918-2008)이 생각난다. 그는 소련의 작가였고, 197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발표되었으나 공산주의 체재에 비판적이란 이유로, 그는 소련 당국의 불허로 스웨덴 노벨문학상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 후 솔제니친은 결국 반역죄로 체포돼 강제로 국외 추방당했다. 1974년 망명길에 올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한 그는 들릴 듯 말 듯 “작가는 조국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라는 감회를 토로했다. 그 후 그는 스위스로 갔다가 미국 버몬트의 한적한 시골마을에 정착했다. 조국과 모국어가 없는 미국, 그 토록 바랐던 자유와 인권이 보장된들 그에게 미국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솔제니친에게 미국은 '1월'과 판박이다. 미국 체류 20여 년 동안 몸은 미국에, 마음은 소련에 머물었으니 야누스와 무엇이 다르랴.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의 소설표제이다. 1959년 전혜린이 독일어로 쓰인 소설을 여원사 출판사에서 처음으로 우리말로 번역했다. 번역이 되자마자 국내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의 소설표제이다. 1959년 전혜린이 독일어로 쓰인 소설을 여원사 출판사에서 처음으로 우리말로 번역했다. 번역이 되자마자 국내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전혜린 이후에 여러 번역본들이 우후죽순 나왔다.

이미륵(1899-1950)의 ‘압록강은 흐른다’라는 소설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언젠가 우체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가 알지 못하는 집 앞에 섰다. 그 집 정원에는 한 포기 꽈리가 눈에 띄었고, 그 열매는 햇빛에 빛났다. 우리 집 뒷마당에서 많이 봐왔고, 어릴 적에 즐겨 갖고 놀았던 이 식물을 그땐 얼마나 좋아하였던가.“ 이미륵은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대 의과대학 전신) 재학 중에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일제의 검거를 피해 상하이를 거쳐 독일로 망명했다. 독립된 조국 땅을 밟지 못한 채 타국에서 숨을 거두었다. 독일인들은 막스 뮐러의 소설 ‘독일인의 사랑’ 만큼 ‘압록강은 흐른다’라는 소설책을 아꼈다. 독일 국어교재에 실리기도했다. 이미륵의 발은 독일에 디디고 서있지만, 의식세계는 조국 대한민국을 향해있었으니 독일은 속이 텅 빈 쭉정이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소설 구석구석에 향수가 짙게 배어있다. 야누스의 두 얼굴이 저 먼 이국에까지 스며들었다고 생각하니 향수와 설움이 인다. 이미륵의 독일에서의 삶이 1월이었다면, 조국을 그리워하는 그의 영혼은 12월이었으리라.

나 또한 고향 떠난 지 벌써 몇 년이던가. 이 몸은 이곳 회색 도심에 비비적대며 살고 있지만 마음은 언제나 수구초심 고향 냇가에 발을 담구고 있으니, 1월과 무엇이 다르랴. 누가 뭐래도 1월은 야누스의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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