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것은 없다. 특히 목숨은. 삶은 소풍이었다, 희극이었다고 미화한 말들은 있지만 정작 가까운 사람의 죽음 앞에서 초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얼마만큼이 자신의 명을 다 하는 나이인지는 모르지만, 갑자기 사고를 당하거나 병마로 운명을 거두는 일은 가족에게 살을 찢는 고통이다.
작은언니 머릿속에 병마가 자라고 있었다. 병원에서는 병을 고치는 게 아니라 병든 사람의 목숨을 연장해주었다. 언니는 실험대상자가 되어 피를 뽑히고, 약을 먹으며, 링거만 꽂았다. 그러기를 3년이 넘었다. 기억이 가물거린다거나, 시력이 떨어졌다는 연락을 받으면 문안을 하였다. 입원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발걸음도 뜸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하더니, 언니는 의식이 없으면서도 이승의 생명줄을 움켜쥐었다.
“엄마가 떠나질 못해요.” 질녀의 연락을 받고 서울로 향했다. 나는 스스로 악역을 자초했다. 언니 손을 잡고 얼굴을 비볐다. 그리고 귀에 가까이 대고 말을 던졌다. “언니, 이제 병마 털어버리고 훨훨 떠나가세요. 아이들 다 컸잖아요.” 한두 번이 아니라 수차례 모진 말을 해댔다. 언니 얼굴에 눈물을 흘리면서 계속 중얼거렸다. 이렇게 목숨을 연장하는 것은 사람답게 사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진정 언니가 편안해지기를 바랐다. 집으로 오는 기차 안에서도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언니가 내 말을 알아들었을까, 알아들었다면 얼마나 서운했을까. 몇 날이 흐른 뒤에 언니는 영영 떠나갔다.
언니의 기일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떠난 지 벌써 일 년, 언니가 떠났을 때는 코로나19는 생각지도 못했다. 당시 영하로 떨어진 기온이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를 에워싸고 있었었다. 그런데 이 무슨 해괴한 바이러스의 장난인가. 서울에 가려니 모두 손사래를 한다. 기차 타면 하루에 다녀올 길이잖은가. 그러나 나만이 아닌, 가족과 우리를 생각해야 했다. 큰언니와 몇 차례 의논하다가 결국은 주저앉고 말았다. 한때는 대구 지역이 바이러스로 인해 봉쇄되다시피 하였으나, 이제는 서울이 더 무섭다는 것이다. 언니의 첫 기일에 질녀가 전을 부쳐 상을 차린단다. 정성으로 차리면 된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내 손으로 음식을 장만해주고 싶었다. 참석지 못한 미안함과 망자에 대한 그리움으로 밤새 뜬눈으로 지새웠다.
작은 조카가 새벽에 외삼촌 댁에 전화 걸어 엄마가 그립다고 울었다는, 외할머니가 보고 싶다며 외가 근처까지 왔다가 되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슴이 먹먹했다. 외할머니는 엄마 떠난 것을 모르잖는가.
엄마 잃은 조카들을 1년 내내 만난 적이 없다. 이모의 무심함을 코로나19 탓으로 돌리기에는 옹색한 변명일 수밖에. 언니 제사상 앞에서 용서를 빌고 싶었다. 산 사람 편하자고 아픈 사람을 떠나라고 했는가. 삶을 포기하라는 말이 모진 말이었다는 것을 시간이 지날수록 죄로 쌓인다. 조카들을 한번 껴안아 주고 싶은데 그마저도 쉽지 않은 현실이 원망스럽다. 언제쯤 이 바이러스가 물러갈까. 조카들을 앞세워 언니를 만나러 갈 날은 언제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