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 거창의 명소 수승대
[우리 산하] 거창의 명소 수승대
  • 이승호 기자
  • 승인 2021.03.08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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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백산과 금원산 자락에 숨은 듯 자리잡은 황산마을

○경남 거창(居昌) 명소 수승대(搜勝臺)

맑은 물과 송림이 어우러진 거창의 명소 수승대. 이승호 기자
맑은 물과 송림이 어우러진 거창의 명소 수승대. 이승호 기자

 

코로나 거리두기 기간임에도 긴시간 호흡을 함께한 답사팀의 답사에 관한 뜨거운
열정으로 눈 내리는 날 거창을 찾았다.
거창(居昌)은 이름으로 보면 가장 큰 마을이다. 
거창은 예부터 거열, 거타, 한들, 거창, 아림, 제창 등으로 불렸다. 거창이라는 이름은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처음 불린 후 주변 영역과 분할, 합병되면서 여러 지명으로 불려오다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크고 넓은 들판'이라는 뜻인데 분지가 산악 지대에서 보기 드문 너른 들판이므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지금도 거창평야의 일부를 한들이라 부르는데 대전의 한밭(大田)과 마찬가지로 큰 들판이라는 뜻이다.
특산물은 사과, 버섯, 오미자, 밤, 양파이다.

○고향 같이 정감가는 거창 황산전통마을

눈 덥힌 금원산 자락에 있는 황산마을. 평화롭게 느껴진다. 이승호 기자
눈 덥힌 금원산 자락에 있는 황산마을. 평화롭게 느껴진다. 이승호 기자

 

황산마을은 경남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에 있다.
명승 제53호로 지정된 수승대 길 건너에 위치하고 있다. 과거에 황산마을은 오지 중의 오지로 '울면서 들어가서 울면서 나오는 곳'이라는 말이 전해질 만큼 산세가 험한 덕유산 줄기의 
기백산과 금원산 끝 자락에  숨은 듯 자리잡고 있다.

오랜 세월을 입증하는 황산마을 입구 당산나무 '안정좌'. 이승호 기자
오랜 세월을 입증하는 황산마을 입구 당산나무 '안정좌'. 이승호 기자

 

마을 입구에는 높이 15m, 수령 600년에 이르는 '안정좌'나무라 부르는 느티나무가 마을의 무게를
입증하듯이 관람객을 압도한다. 마을 중앙에는 '거창 황산리 신씨 고가'가 자리잡고 있다.
실개천을 중심으로 동쪽을 '동녘(황산 2구)'이라 부르고 서쪽은 '큰땀(황산 1구)'이라고 한다. 동녘과 큰땀을 합쳐 약 150여 호가 있는 마을이며 큰땀은 거창 신(愼)씨 130여 명이 거주하고 있는 거창 신씨 집성촌이다. 거창 신씨 (居昌 愼氏)의 시조는 신수(愼修)이다. 중종의 왕비인 단경왕비의 아버지 신수근(1450~1506)이 있고 이후 황산마을이 본격적으로 신씨의 집성촌으로 자리 매김하는 것은 중종 35년(1540) 신권(1501~1573)이 이곳에 은거하며
구연재를 세우고 후학들을 양성한 이후부터다.
신권은 거창의 거유인 갈천 임훈의 매부이기도 한데 소년 시절 한양에서 공부하다 
'벼슬은 사람으로부터 받는 것이고
자아는 하늘로부터 받는 것이다. 
나는 안빈낙도하면서 오로지 인격 수양에 힘쓰겠다'라며 황산마을로 내려왔다고 한다.
사림은 1573년 신권이 죽자 구연재를 구연서원으로 개칭하고, 이 서원에 배향했다.
황산마을 입지는 대체로 평탄하며 주택들은 햇빛을 잘 받는 남동향이다.
마을 전체가 기와집으로 무리지어 있는 
이유는 이른바 씨족 부농으로 소작 마을을 
별도로 두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소작이란 토지 소유자가 자신의 토지를 직접 경작하지 않고 토지 이용권을 일정 조건에 임대인에게 빌려줘 토지 이용 대가, 즉 지대를 받는 것이다. 조선 시대의 경우 왕실, 양반 관리, 사찰 등 대지주나 향촌의 사대부, 향리 등이 농장을 개설하고 노비나 일반 농민을 모집해 운영했고 소규모 토지 단위로 행해지기도 했다. 보통 '병작반수제'라 해 농산물의
50퍼센트를 거두어 갔다고 한다. 
큰땀에는 양반, 개울 건너 동녘에는
소작인이 주로 살았다고 한다.

거창 신씨 집성촌 황산마을, 흙돌담길이 정겹다. 이승호 기자
거창 신씨 집성촌 황산마을, 흙돌담길이 정겹다. 이승호 기자

 

고로, 황산전통마을이라 함은 큰땀을 의미한다.
큰땀의 명성은 마을의 돌담길로도 알 수 있다. 길이는 약 1.2킬로미터에 이르고 고유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어 2006년 대한민국 등록 문화재 제259호로 지정되었고, '전국의 아름다운 돌담길 10선' 중 한 곳으로 뽑혔다. 대부분의 전통 마을과 같이 토석 담으로, 흙과 돌을 이용하는 황토색 짙은 담장이다. 정감가는 토속적인 긴 흙돌담과 도로의 조화가 아름답다. 
포근한 느낌을 주는 눈 내린 들판과
한옥마을이 한폭의 산수화 같다.
입장료와 주차료는 없다.
승용차 주차장은 마을 안쪽 
1•2구 사이 실개천에 있다.
종가댁, 국장댁, 교감댁, 조합장댁 등 의미있는 댁호로 많은 가옥들이 민박을 한다.

○인적인 없는 수승대(搜勝臺)

큰 비석들이 즐비한 눈내린 요수를 배향한  구연서원. 수승대 거북바위 옆에 있다. 이승호 기자
큰 비석들이 즐비한 눈내린 요수를 배향한 구연서원. 수승대 거북바위 옆에 있다. 이승호 기자

 

수승대는거창군청 소재지에서 위천면사무소를 지나 서쪽으로 약 1㎞ 지점에 있다.
수승대는 우거진 노송과 옥빛 맑은 물, 신선이 놀았을 듯한 그림 같은 정자가 어우러진. 아름답고 경이로운 경승지이다. 예부터 원학동계곡의 안의삼동(安義三洞)으로 불리는 함양 화림동, 용추계곡 심진동과 함께 경관이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중종 때 요수 신권(樂水 愼權'1501~1573)이 이곳에 은거하면서 구연서당(龜淵書堂)을 건립하고 후학을 양성했던 곳이다. 바위 모양이 거북을 닮았다 하여 암구대(岩龜臺), 구연동(龜淵洞)
혹은 수송대(愁送臺)라 불렸다.
1543년 퇴계 이황이 안의현 삼동을 유람차 왔다가 신권을 만나기로 했으나 임금의 부름을 받고 급히 올라가면서 '근심 어린 마음으로 보낸다'(愁送)란 뜻이 아름답지 못하다 하여, 수승대로 고칠 것을 권하는 오언율시를 남겼다. 요수가 답시(答詩)를 보내고 바위에 새겨 그때부터 수승대라 한다.
퇴계가 남긴 시(詩)는 다음과 같다.

/수승이라 이름하여 새로 바꾸니
봄을 맞이한 경치 더욱 아름답다.
숲 속의 꽃들은 꽃망울 터트리려는데
그늘진 골짜기 눈은
아직도 덮여 있네
먼 곳에서 수승대를
그윽이 바라보니
그늘진 골짜기 눈은
아직 덮여 있네
먼 곳에서 수승대를
그윽이 바라보니
오로지 서로를 그리워하는 
마음 더하기만 하구나
언젠가는 한 두루미의
술을 가지고
큰 붓 들어 단애의 아름다움을
그려볼까 하노라.

퇴계와 요수가 서로에 대해 가진
큰 신의와 아름다운 믿음을 확인 할 수 있다.

tip: 
•수승대에는 식당과 편의점, 안내소, 주차장 호장실 등  편의시설이 다있다. 입장료는 없으나 주차료는 있다.

•고향의 향기가 나는 '다우리 밥상'
055) 942-2295, 010-2215-1116

식당은 매표소 안에 있다. 
계절반찬 12가지가 나오는 메뉴
 '다우리반상'은 2인분 24,900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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