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어날 추억] ③한복의 멋.... 그때가 그립다
[꽃 피어날 추억] ③한복의 멋.... 그때가 그립다
  • 유병길 기자
  • 승인 2021.04.07 17:00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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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들은 일류 디자이너 재봉사 였다. 옷감인 삼베 명주를 자급자족 하였다.
남여노소 모두가 한복을 입었다.

1950년대 봉강리(경북 상주군 외서면) 여인들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여인들은 일류 디자이너이고 재봉사였다. 식구들의 옷은 직접 만들어 입혔다.

안방 윗목 경대 옆에는 바느질할 때 사용 할 수 있는 반짇고리가 있었다. 반짇고리에는 크고 작은 바늘이 꽂혀있는 바늘꽂이, 실이 감겨있는 실꾸리, 가위, 골무, 자 등이 담겨 있었다. 한복이나 버선을 만들 때 감을 자르기위해 종이로 만든 본은 몇 집에 더러 있었다. 오래 사용한 본은 찢어지고 누렇게 찌들었다. 빌려서 사용하고 새 문종이로 다시 만들기도 하였다. 옷을 처음 만드는 어린 처녀들은 본을 놓고 재단하였으나, 옷을 잘 만드는 어른들은 본 없이 재단하였다.

그 당시는 모든 것이 그렇듯이, 옷도 옷감도 자급자족하였다. 봄가을 누에를 치고 누에고치로 실을 뽑아 베틀에 올려 명주를 짰다. 삼(대마)을 키우고 베고 큰솥에 삶아 껍질을 벗겨 삼을 삼았다. 물레(얕게 찢은 껍질을 양쪽을 두 갈래로 갈라 무릎에 놓고 밀고 당겨 실로 연결하는 것) 로 돌려 실을 단단하게 하여 베틀에 올려 삼베를 짰다. 목화를 키우고 가을에 목화송이를 뽑아 실을 뽑고 베틀에 올려 베를 짰다. 물감을 들이거나 희게 표백하여 명절이나 큰일이 있을 때 가족들의 한복을 재단하여 옷을 직접 만들어 입혔다. 재단하여 옷을 만들 때 희미한 호롱불 밑에서 바늘에 실을 꿰어 한땀 한땀 바느질하여 무명 베옷 삼베옷 명주옷 등 만들 때는 밤잠을 설쳐가며 많은 고생을 하셨다.

처녀들이 시집가기 꼭 배워야 할 것은 많았지만, 필수항목은 모든 옷을 만들고 손질을 하고, 음식을 맛있게 만드는 요리사였다.

외출시에는 한복에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썼다. 유병길 기자
외출시에는 한복에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썼다. 유병길 기자

그때 남자들이 입었던 평상시 한복은 중의(남자용 여름 홑바지) 위에 대님을 매고 버선을 신고 허리끈을 묶고, 적삼위에 조끼를 입었다. 외출할 때는 위에 두루마기를 입고 상투 위에 망건을 쓰고 갓을 쓰고 검정 고무신이나 짚신을 신고 나갔다. 겨울에는 중의와 적삼에 솜을 놓았다.

남자들은 일할 때도 한복을 입었고 물 논에서 일할 때는 중의를 걷어 올리고 일하였다. 1953년 휴전되고 제대한 젊은 남자들은 군복을 검은색으로 염색하여 작업복으로 입기 시작하면서 일할 때 작업복, 밖에 나갈 땐 외출복이 되었다.

남자 학생들의 교복이다. 유병길 기자
남자 학생들의 교복이다. 유병길 기자

직장에 다니는 공무원 선생님들은 양복을 입었다. 어린아이들도 한복을 입었고, 학생들은 교복을 입고 흰 고무신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흰색 한복 치마 저고리는 여인들의 일상 옷이였다. 유병길 기자
흰색 한복 치마 저고리는 여인들의 일상 옷이였다. 유병길 기자

여자들은 밑이 트인 고쟁이를 입었다. 속치마를 입을 때는 오른쪽 왼쪽 양쪽 어깨끈을 끼우고 허리를 묶었다. 한복 치마의 말기에는 양쪽에 끈이 있다. 양쪽 끈을 잡고 앞에서 뒤로 돌려 끈을 바꾸어 잡고 가슴까지 올려 젖가슴을 당겨 매었다. 겨울에는 솜을 놓아 만든 저고리를 입고 버선을 신고 검정 고무신을 신었다. 바람이 불면 소매 끝과 앞가슴 쪽으로 바람이 술술 들어왔을 것이다. 양반집 여인들은 외출 시 저고리 위에 조끼를 입고 두루마기를 입고 머리에 마고자를 썼고 흰고무신을 신었다.

여학생들의 교복이다. 유병길 기자
여학생들의 교복이다. 유병길 기자

여선생님들도 한복을 입었다. 여학생들의 교복은 검은 치마에 흰 저고리였고 흰고 검은 고무신을 신었다. 50년대 후반에는 젊은 층이 통치마를 입기 시작하면서 유행하여 간편하게 입게 되었다.

옷이나 옷감 등을 넣어 보관한 고리짝이다. 유병길 기자
옷이나 옷감 등을 넣어 보관한 고리짝이다. 유병길 기자

 

자주 안 입는 옷은 설합 장에 넣거나, 고리짝에 넣어 안방 동쪽벽에서 서쪽벽으로 긴 서가래 두 개를 꽂아둔 곳에 얹어두었다. 자주 입는 옷은 아랫목 양쪽 벽에 못을 박고 끈으로 기다란 대나무 양쪽을 묶어두고 옷을 걸어 두었다. 먼지가 안지 않게 햇대보로 덮었다. 읍내에 생긴 틀(재봉틀) 집에서 남자 양복을 맞추고 여자 옷도 맞추어 입게 되었다.

1960년대 우리 군이 월남전에 참여하면서 치마 말기에 고무줄을 넣는 월남치마가 유행하면서 양복점 양잠 점에서 옷을 맞추어 입었다. 70년 이후에는 맞추어 입는 옷보다 기성복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사서 입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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