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녕김씨 문중의 백촌 김문기(白村 金文起)선생을 모신 경의재는 금호강변인 노곡동에 들어서서, 좁은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면 대구시 북구 노곡로 4길 28에 위치하고 있다. 입구에는 태충각을 설명하는 안내문이 있고, 재실 대문인 유의문(由義門)을 들어서면 중앙에 태충각(泰忠閣)이 있다. 태충각과 경의재는 백촌 김문기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후손인 노연(路淵)과 서연(書淵)이 주관하여 고종 37년(1900년)에 건립하였디. 태충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홑처마 맏배지붕으로 되어있다. 비문(碑文)은 은률 송병각이 짓고, 서(書)는 달성 서찬규가 쓰고, 전자(篆字)는 순천 박종현이 썼다. 빗돌은 높이 135cm, 폭 58cm, 두께 33cm이다.
태충각의 왼쪽에는 백촌 김문기선생의 재실인 경의재가 위치하고 있으며,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되어 있다. 오른쪽에는 노곡동에 처음 정착한 입항조 김귀송(金貴松)의 재실인 사성재(思誠齋)가 자리잡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되어 있다. 뒤쪽에는 백촌 김문기선생의 사당 성인사(成仁祠)와 입항조 김귀송의 사당 숭효사(崇孝祠)가 있다. 경의재에서는 매년 음력 9월 9일에 백촌 김문기선생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사성제에서는 매년 음력 3월 10일에 입항조 김귀송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
백촌 김문기선생은 1399년 충청도 옥천군 사단동에서 출생하였다. 1426년(세종 8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430년 예문관검열, 1436년 사간원좌헌납, 1439년(세종 21년)에 경상도아사(慶尙道亞使)로 부임하였다. 재임 중에 금호강변 노곡동을 찾아와 휴식을 하였다. 그가 앉았던 노론습례(魯論習禮)라는 글이 쓰여진 바위를 아사암(亞使巖)이라 불렀는데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면서 묻혔다고 전해진다. 1445년 (세종 27년) 함길도 도진무, 1448년 겸지형조사, 1450년 병조 참의, 1451년 (문종 1년) 함길도 관찰사, 1453년(단종 1년) 형조 참판, 1455년(세조 1년) 공조 판서 등 관직을 역임하였다. 1456년(세조 2년) 단종 복위 모의 사건에 연류되어 아들 현석(玄錫)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1731년(영조 7년) 복관작의 교지가 내려지고, 1778년(정조 2년)에 충의(忠毅)의 시호를 받았다. 1781년 (정조 5년)에 숭정대부 의종부 좌찬성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세손이사로 증직되었다. 1977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사육신으로 현창함이 마땅하다”고 결론을 내려 1978년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 가묘로 봉안하고, 의절사에 위패를 모셨다. 백촌 김문기 선생의 영정을 봉안한 금회영각(琴回影閣)은 달성군 다사읍 세천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 처음 자리를 잡은 입항조 김귀송은 김녕김씨 충의공파(忠毅公派) 14세손으로 백촌 김문기선생이 경상도아사로 재직시 자주 찾았던 노곡동으로 이주하여 그 후손들이 지금의 김녕 김씨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충(忠)과 효(孝)가 사라져 가는 오늘날 후손들은 백천 김문기선생의 충절을 길이 보전해야겠다. 재실에 대한 안내와 설명을 해준 이는 김녕 김씨 노곡대종중회 김효웅 명예회장과 김수호 사무국장이다.
노곡동은 대구광역시에 속하지만 아직도 시골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마을이다. 경의재 인근인 금호강 하중도에는 봄에는 유채꽃, 여름에는 청보리, 가을에는 코스모스와 해바라기가 만발하여 대구시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