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임금이 시를, 인조임금이 정문을, 의친왕이 친필을
세월은 흘러도 산은 푸르고 높으며
정의로운 기운은 온천지에 가득하네
북으로 가거나(김상헌이 심양에 간 것)
남으로 오거나(정온이 모리(某里)로 온 것),
의리는 매한가지인데
금석같이 굳고 정결한 절개는 아직도 삭아 없어지질 않네.
日長山色碧嵯峨 鍾得乾坤正氣多
北去南來同一義 精金堅石不曾磨
(정조임금이 정온의 충절을 기려서 내린 시)
충신당(忠信堂)은 동계(桐溪) 정온(鄭蘊)의 고택으로 경남 거창군 위천면 강동 1길 13번지에 있다. 기백산, 금원산, 현성산 등 명산이 둘러싼 산자락 아래 평야가 시작 되는 지점에 있다. 마을 앞으로는 강천(薑川)이 서출 동류하여 수승대의 위천과 만나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에 자리하고 있다. 동계 정온 선생의 초계 정씨 선조분들은 거창의 용산, 안음 등지에서 살았다. 동계의 조부(승지공 정숙) 때 강동마을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충신당은 동계 정온(1569~1641) 선생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아온 종택이다.
정온 선생은 1569년(선조 2년) 거창 강동마을에서 출생했다.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고 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까지 죽음으로 몰고 가자 이에 반대하였다. 결국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서 문초를 당했다. 그의 인품에 감동한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겨우 구명을 받았지만, 결국 제주도로 유배가는 신세가 된다.
1840년 추사 김정희 선생이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었다. 동계 정온 선생의 높은 학덕, 절의, 곧은 품성을 칭송하는 제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1848년 귀양에서 돌아와 동계고택을 방문하여 충신당이란 현판(당호)을 써 주었다.
이후 인조반정이 성공하여 자유를 얻었지만, 병자호란에 패하여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나라에 굴욕적으로 항복했다. 이를 참을 수 없었던 정온은 목숨을 끊으려다 실패하고, 1638년(인조 16년)에 고향으로 내려와 덕유산 자락 모리라는 곳에서 은거하다 1641년에 생을 마감 했다. 훗날 정조 임금은 그의 충절을 기려 영의정으로 추증하였다.
그 후 정온의 현손(손자의 손자)인 정희량이 이인좌의 난으로 더 잘 알려진 무신란(戊申亂)에 가담하였다. 멸문지화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집안을 살려 낸 것은 돌아가신 정온이었다. 세상은 목숨을 걸고 직언하던 실천 유학자 정온을 잊지 않고 있었다. 정희량의 죄야 용서할 수 없지만 충신 정온의 제사를 끊기게 할 수 없다는 의견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고택은 대문채, 사랑채, 중문간과 행랑채, 곳간채, 안채, 사당 등이 토석 담장으로 구획되어 있다. 현재의 고택은 후손들이 정온 선생의 생가를 1820년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는 사랑채 상량대에 적혀 있는 기록화보고서로 확인할 수 있다.
동계 고택은 1984년 국가민속문화재 제205호로 지정 되었다. 솟을대문의 대문간 채를 들어서면 문위에 ‘문간공동계정온지문(文簡公桐溪鄭蘊之門)’이라 쓰여 있다. 10년이나 귀양살이를 했지만 영창대군의 처형을 반대한 충절과, 병자호란 때에는 끝내 화친을 반대하며 절의를 굽히지 않았던 동계 정온을 기려, 인조 임금이 내린 정문이다.
솟을대문의 대문간 채를 들어서면 ㄱ자형의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 안쪽으로 一자형의 안채가 있다. 안채의 오른쪽에는 뜰아래채가, 왼쪽에는 곳간채가 있다. 안채의 뒤쪽에 따로 담장을 두르고 3문을 설치한 후 사당을 세웠다.
사랑채는 꺾인 부분을 누마루로 꾸미고 눈썹지붕을 설치한 점이 특이하다. 안채와 사랑채는 북부지방 가옥의 특징인 겹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은 낮고 툇마루를 높게 설치한 남부지방 고유의 특징도 함께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집의 학술적 가치를 찾을 수 있으며, 조선 후기 양반주택 연구에 좋은 자료이다.
사랑채 당호 충신당 옆에는 모와(某窩)라는 작은 현판이 걸려있다. 1909년 의친왕이 구한말 승지를 지낸 이 집 종손 정태균과의 인연으로 40일 동안 머물 당시 남긴 친필이다. ‘모와’란 ‘매화나무집’이란 뜻으로 충의와 지조로 나라의 안위를 걱정했던 동계 정온의 집을 일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