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등병의 전쟁 일기
이등병의 전쟁 일기
  • 유무근 기자
  • 승인 2021.06.14 10:00
  •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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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석 수훈자협회 전 칠곡지회장의 증언

-신의주 온정리까지 북진, 통일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  

 

김화석 수훈자협회 전 칠곡지회장의 6.25 전쟁 당시 모습. 김화석 제공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그해 7월 27일 영천시 신령면 갑티재 부대에 자원입대했습니다. 며칠 동안 훈련을 받는데 부대에 아직 총도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수류탄 10발씩 받아 목표물에 던지는 훈련을 반복하면서 찌는 듯한 삼복더위와 먼저 싸워야 했습니다”

“이틀 후에 미군에게 M1 소총을 지급받아 갑티재 야간 기습 전투에 투입되었습니다. 영천시 화산면에서 인민군이 포항에서 올라오는 걸 차단하는 것이 임무였습니다. 전투는 새벽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옆에 있던 전우가 적의 총탄에 맥없이 고개를 떨구고,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어도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적에게 식별되면 수류탄이 날아오기 때문입니다”

“영천 시가전을 마치고 신령면 갑티 재 기슭에서 안동으로 가는 길을 따라 가며 전투를 했는데 적들은 후퇴하면서 반격하고 있었습니다.

6.25전쟁 당시 자원입대하여 57년에 상사로 전역한 김화석 무공수훈자협회 전 칠곡지회장을 만났다. 김회장은 지난 3월 5년의 지회장 임기를 마쳤다.

- 북진했던 그 과정들을 듣고 싶습니다.

▶ 9.15 인천상륙작전으로 9.28에 서울을 수복했습니다. 융단폭격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전투에 승기를 잡고 전선을 장악해 북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부대는 강원도 원산에서 태백산 줄기를 넘어 평안남도 양덕(온천 특구)을 갔어요. 조금 더 가면 평안북도 성천입니다. 성천은 청천강 입구입니다. 우리 부대는 도하작전을 했습니다. 반드시 성공해야 할 중요한 작전입니다.

도하작전으로 강을 건너 영변을 지나 자강도 희천(이웅평 인민군 공군 대위 귀순 고향) 초등학교에서 하루를 묵었습니다. 영변 어귀에 올라보니 압록강과 두만강이 곧 눈에 선하여 남북통일은 코앞에 다가온 듯 해 혈기에 들떠있었습니다.

일개 분대는 신의주 방면 온정리에서 90리 정도 거리에 있는 6사단 19연대 우리 부대 보급소에 경비하러 갔습니다. 새벽 2시경 용변 보려 밖에 나갔더니 10월 초인데도 세찬 눈발이 뿌리고 금세 쌓였어요. 희천에서 사흘이나 걸려 원산 넘어왔어요. 발바닥 물집이 불어 터져 신발도 벗지 못하고, 고향 생각이 나서 연신 눈물을 훔쳤지요.

 

국군에게 잡힌 인민군 포로들.  blog 한국전쟁발췌

<중공군이 개입하다>

앞서가던 중대장이 “중공군이 개입했다”라고 외치며 통지문을 보여주었습니다. 나는 두 달짜리 이등병이었다. ‘압록강까지만 가면 전쟁이 끝난다’ 이렇게 희망을 품고 전우를 잃어가며 죽음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왔었는데 중공군 개입 소식을 들으니 앞이 캄캄할 만큼 큰 충격이었다.

군용트럭 뒤에 포를 장전하고 북쪽이 아닌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지 않은가! 6사단 7연대 포병대 후퇴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아군이 후퇴하고 있었다.

이 상황을 일등 하사에게 즉시 보고 했고, 지휘관 소령까지 전달되었다. 지휘관은 꼭두새벽 에 철모에 권총을 차고, 진지로 가는 도로를 건너기 직전에 “엎드려!” 두 번 외쳤다.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났다. 기마병 인가? 사람은 보이지 않고 말 등에 삐딱하게 엎드려 총을 쏘며 지나갔다. 발과 손등에 실탄을 맞았다. 피는 흘렀지만 큰 부상은 아니었다. 취사반으로 안정을 위해 갔는데 온정리 뒷산에는 우리보다 먼저 피신한 이들도 많아 불을 피워 추위를 녹이고 있었다.

온정리 고지는 꽤 높은 편이다. 잠시 앉을 사이도 없었는데, 매복해 있던 중공군이 중턱에서 피리 불고 꽹과리를 치고 고함을 지르며 내려오고 있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중공군에 놀라 일단 도망을 가는데 적군과 아군이 뒤섞여 아수라장이 되었다. 우리 포병부대가 적군을 겨냥해 남쪽을 향해 사격을 해대니 희생자도 생기고 그야말로 생지옥이 되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모두가 흩어지고 말았다.

<포로가 되다>

온정리에서 흩어진 몇몇이 낙오병이 되어 밤새도록 도망하여 희천에 도착하자마자 중공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습니다. 2주일 만에 기회가 있어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나 혼자 탈출해 청천강에서 미군 탱크부대에 식별되어 심문을 받았는데 포로로 취급받았어요. 통역관에게 소속 부대와 관등성명을 알리고 직통 전화 확인을 거친 후에야 국군으로 인정을 받고, 그 부대 대대장 숙소 임시 보초병이 되었지요.

임시 보초병으로 근무 중에 평남 안주에 가면 국군들이 있으니 헌병의 안내를 받아 원대 복귀하라는 명령을 미군 부대로부터 전해 받았다.

헌병대에 가니 안내 병을 보내와 10개월 만에 3대대 9소대에 원대 복귀하였다. 전사자로 분류되어 집으로 전사자 통보를 했다고 한다. 행정반 오 중사가 전사자라고 빨간 줄그었는데 살아 돌아왔다며 반가워해 주었다.

포로 생활도 힘들었지만 미군과 함께 성천에 있는 인민군 농협창고에 돈을 다 끄집어내 소각을 시켰다. 한 움큼 꺼내어 잘 사 먹었던 기억도 있다. 이북에 장마당 장이 서 있는 날인데 미군들도 난전에서 기호 음식을 사 먹었다.

6.25 전쟁 당시 인민군 포로의 모습. blog 한국전쟁발췌

<칼바람에 대동강도 얼었다>

폭설이 내리고 대동강이 얼어붙었는데, 얼음 위로 탱크 앞세워 장비 차 몰고, 미군도 같이 후퇴 대열에 합류했어요. 우리도 후퇴하는 중이라 며칠간 준비해 대동강을 건넜어요.

얼음 위로 탱크 따라 후퇴하면서 살을 에는 맹추위와 칼바람에 고개를 가눌 수가 없었다. 발바닥 물집이 부풀어 터져 통증이 칼바람보다 더 아파 왔다. 보름 동안 군화를 벗지 못하고 한쪽 눈 감고 절룩거리며 행군했습니다. 영천에서 시작해 평안북도까지 걸어서 행군했고 잠도 부족하여 게다가 후퇴하는 중이라 피로가 누적되었다. 통일이 눈앞에 있었는데 이 개고생 한다 생각하니 원통하기 짝이 없었다.

- 전쟁에 참전하여 포로도 되고 남다른 고생을 하셨습니다. 기쁨보다 가슴이 아팠던 일이 많았으리라 여겨집니다. 우선 기억에 남는 것부터 말씀해 주세요.

<친구야 미안하다>

▶ 눈물부터 나려고 합니다. 고지를 점령하면 전세는 유리하지요. 고지로 올라가다가 적의 공세가 너무 심하고 화력이 강하면 일단 후퇴를 해야 합니다. 후퇴할 때 전사자 부상자 낙오자가 생기지요. 같이 공격하던 친구가 갑자기 동작이 끊기고 허벅지 관통상으로 같이 좀 가자고 절규를 해도, 비 오듯 날아오는 총탄에 어깨를 걸고 동반 하산할 겨를이 없었다. 같이 죽을 판이다.

다른 친구들도 거기서 후퇴할 때 둘이나 죽고 부상자도 있었다. 평양 대동강 밑으로 후퇴할 때도 내 짝 친구 또 하나 죽고, 부상하여 같이 가자고 애원하는 친구를 그냥 두고 내려왔습니다. 저녁에 친구 이름 부르며, 같이 못 와 미안하다고 목 놓아 울었습니다.

<저승 갔다 온 빨갱이>

우리는 보병이니까 완전 무장하여 원산까지 걸어갔어요. 원산에서 신고산에 도착하니 평양 가는 길 동네 어귀에 마을 사람들이 좌익분자 열댓 명을 밧줄로 묶어 도로가에 꿇어 앉혀놓고 우리보고 ”이것들 다 죽이고 가 주세요“ 라고 거듭 당부를 해왔어요. 묶여 있는 일반인이라 죽일 수는 없었다. 묶어놓은 놈들 못 죽이면 나중에 우리가 죽는다는 외침도 들렸어요. 어떤 이는 ”죽여야 한다“ ”살려줘야 한다“. 의견들이 분분했어요. 지휘관의 명령을 기다렸으나 명령이 없어 우리는 모른 체하고 지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군복만 입지 않았을 뿐 적군과 다름없는 빨갱이를 제거하지 못한 것이 제대하는 그 날까지 두고 두고 후회스러웠다. 당시 지휘관도 원망했고 지금도 원망한다. 전사한 동료들도 아마 나와 같은 생각이었으리라.

인천상륙작전  칠곡군 제공

- 전쟁 중에 모두 괴로운 일이었지만 와중에도 보람이 있었다면?

▶ 특등 사수는 아니지만, 적의 무리에 명중률이 높았다고 자부합니다. 영천 전투에서 승전하고 신의주 온정리까지 북진할 때 통일이 내다보였고, 친구를 잃어가며 죽음의 대동강을 건너 후퇴하여, 대한민국 본토까지 임무를 마치고 왔다는 게 보람입니다.

* 신의주 근처에서 중공군과 전투하면서 육군 소령이 중공군에 포로가 되었어요. 내가 교란 작전으로 틈새를 이용하여 미리 알려준 은신 통로를 안내해 주어 탈출했어요, 지금 생존해 있다면 100세 일 것이다. 내 나이 89세이니까.

- 화랑 무공훈장을 받으셨는데, 당시 상황을 말씀해 주세요.

▶ 1953년 치열한 영천전투에서 척후병으로 나갔습니다. 매복해 있던 적의 분대를 공격하여 인민군 중위, 특무상사 2명을 생포하여 부대에 인계했습니다. 1954년 3월 1일 이주일 사단장으로부터 화랑 무공 훈장을 받았습니다. 1950년 7월에 입대해 1957년 상사로 전역했다.

- 수훈자 지회장으로서 정부에 건의하고 싶은 말은?

▶ 참전 수훈자 보상이 적습니다. 다른 수훈자에 비해 적습니다. 국가를 위해 헌신 한 상이 대상인데 월 68만 원 나와요. 상이군경은 후방에서 조금만 다쳐도 장애등급 6급이 나옵니다.

죽을 고비를 그렇게 당하고 고생했어도 급수 못 받으면 수당이 나오지 않아요. 오랜 세월 자부담으로 치료하여 호전되었으면 과거 쓰라린 고통은 무시해 버려요. 상이 수훈자 지원은 추가 심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6.25 참전 유공자도 두 종류가 있어요. 6.25 전쟁 나고 1950년에서 1953년 휴전되기 전에 입대한 사람과, 훈련소에서 휴전되어 적과 한 번도 싸워 보지도 않은 군인도 유공자 대우를 받고 있어요. 예우가 달라져야 합니다.

 

김화석 수훈자협회 전 칠곡지회장이 한국 전쟁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유무근 기자

- 후배들에게 덕목이 될 덕담 한 말쯤 해주세요.

▶ 요즘 군 복무와 관련해서 다소 해이해졌다는 소리를 들으면 안보에 불안을 느끼곤 합니다. 당시에는 36개월 만기 제대했습니다. 요즘은 18개월로 단축되었다지요, 게다가 군기가 해이 해져 ‘상명 불복종’ ‘황제 휴가’ 이런 용어 자체를 몰랐어요. 그저 단체기압 안 받고, 안 맞는 게 상책이었지요. 안 맞으려고 군기가 든 게 아닙니까. 그때는 노크 귀순도 없었습니다.

거두절미하고, 대한민국 아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다녀와야 하는 성인 관문으로, 18개월이 보람된 남아 공동체 발판이 되었으면 합니다.

- 존경하는 지휘관과 대통령이 있는지요?

▶ 존경할 만한 군인이 있습니다. 포항 영천 간 제 말 전투에서 부하들의 참사를 막고자 장렬히 희생을 선택한 ‘박 철’ 대대장입니다. 영천 3군 사관학교에 전적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 존경하는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건립한 이승만 대통령과 보릿고개를 타파하고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우뚝 세우신,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합니다.

- 유학산 전투나 328, 323고지에 참전했던 군인은 몇 분이나 생존해 계시는지요?

▶ 칠곡군이 최대 격전지였고 희생자도 엄청 많습니다. 안타깝게도 유학산 및 칠곡군 전투 참전자는 2015년 6명이 생존했으나 올해 4월 하재근(91)옹을 마지막으로 생존자는 없습니다.

수훈자협회 칠곡군지회 6명 중 한 명이 참전했다고 들었는데 확인해야겠지요. 그 외 6.25 전쟁 참전용사는 칠곡군 산하 100여 명이 읍·면 단위로 향우회를 하고 있으나 연로하여 요양원이나 자택에서도 거동이 제한되어 회원이 줄고 있습니다.

 

전우야 잘 자라.  blog 한국전쟁 발췌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 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떨어져 간 전우야 잘 자라.

터지는 포탄을 무릅쓰고 앞으로 앞으로

우리들이 가는 곳엔 3.8선이 무너진다

흙이 묻은 철갑모를 손으로 어루만지며

떠 오른다 네 얼굴이 꽃같이 별 같이 ~

조국을 위해 채 피워보지도 못한 채 몸 바친 숭고한 영령들에게 그대들이 힘차게 불렀었던 전우야 잘 자라. 이 노래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