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하게 일을 다스리고 사람을 보는 법을 전하다
저자 이한우는 1961년 부산에서 태어나 고려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철학과 석사 및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뉴스위크>와 <문화일보>를 거쳐 1994년 <조선일보>로 옮겼다. 2002~2003년 논설위원을 지낸 후 문화부 기자로 학술과 출판 관련 기사를 썼으며 문화부 부장을 역임했다. 현재 논어등반학교 교장으로 1년 과정의 논어 읽기 강좌를 비롯한 다양한 원전 강독 강의를 통해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군자 리더십을 설파하고 있다.
저자는 <논어>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일의 이치(事理)에 따라 일을 하고 일의 이치에 따라 사람을 잘 가려서 마침내 그 일을 성공으로 이끄는 법을 말해 주는 책이다."라고 한다. 사리(事理)를 아는 사람이라면 때를 기다릴 줄도 알고 일시적인 굴욕을 참을 줄도 안다. 더불어 때가 왔을 때는 망설이지 않고 행동에 나설 줄도 알고 일단 일을 시작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다. 저자는 <논어>와 역사적 사례를 교차시켜 가면서 다양한 인물들을 탐구하고 이를 통해 일의 이치를 분별하는 힘을 기르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이 책을 썼다.
목차는 '1장 사리분별, 나를 다스리는 게 먼저다, 2장 사람 사이에는 지켜야 할 것이 있다, 3장 일과 사람을 동시에 얻는 법'으로 되어 있으며, 1장에서는 '부끄러움을 알고 구차하지 않게 살라' 외 5편의 글, 2장에서는 '사람 사이에 가고 오는 것을 중요히 여겨라' 외 5편의 글, 3장에서는 '곧음은 난세를 잘 살아내는 일의 이치다' 외 10편의 글이 실려 있다.
1. 부끄러움을 알고 구차하지 않게 살라
공자가 명시적으로 구차함(苟)의 문제를 제기한 것은 <논어> '자로 편'에서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공자가 생각했던 구차함의 깊은 의미를 포착할 수 있다. 그 유명한 정명(正名)을 이야기하는 대화에서다.
자로가 물었다. "위나라 군주가 스승님을 모셔서 정치에 참여시키려고 하니 스승님께서는 정치를 하시게 될 경우 무엇을 우선시 하시렵니까?"
공자는 말했다. "반드시 이름부터 바로잡겠다(正名)."
이에 자로가 말했다. "이러하시다니! 스승님의 우활하심이여! (그렇게 해서야) 어떻게 (정치를) 바로잡으시겠습니까?"
이에 공자는 말했다. "한심하구나, 유여! 군자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은 비워두고서 말을 하지 않는 법이다. 이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순하지 못하고, 말이 순하지 못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예악이 흥하지 못하고, 예악이 흥하지 못하면 형벌이 알맞지 못하고, 형벌이 알맞지 못하면 백성들이 손발을 둘 곳이 없게 된다. 고로 군자가 이름을 붙이면 반드시 말할 수 있고, 말할 수 있으면 반드시 행할 수 있는 것이니 군자는 그 말에 있어 구차히함이 없을 뿐이다."
여기서 보듯이 정명이란 곧 그 말을 함에 구차스러움이 없는 것을 뜻한다. 그러면 구차스러움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여기서 공자가 말한 형벌의 문제가 우리에게 시사를 던져준다. '위정(爲政) 편'에 그 답이 있다. 공자의 말이다.
"백성을 법령으로써 인도하고 형벌로써 가지런히 하면 백성이 법망을 면하려고만 하고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 백성을 빼어남으로 인도하고 예로써 가지런히 하면 부끄러움을 알게 되고 또 감화될 것이다."
그렇다. "법망을 면하려고만 하고 부끄러움이 없는 상태(無恥)"가 바로 구차스러움이다. 반면에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곧 불구(不苟)다. 결국 공자는 구차스러움이 없는 말을 통해 구차스럽지 않은 백성을 길러내는 것이 곧 다움에 의한 정치(德政), 곧 인정(仁政)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것을 공자는 '태백 편'에서 이렇게 정리한다.
"공손하되 예가 없으면(無禮) 수고롭고, 삼가되 예가 없으면 두렵고, 용맹하되 예가 없으면 위아래 없이 문란해질 수 있고, 곧되 예가 없으면 강퍅해진다. 임금이 친족들에게 돈독히 하면 곧 백성들 사이에서 어진 마음과 행동이 자연스레 생겨나고, 또 (새로 등극한) 임금이 옛 친구, 즉 선왕의 옛 신하들을 버리지 않으면 백성들은 구차한 짓을 하지 않는다."
여기서 수고롭고 두렵고 문란해지고 강퍅해지는 것 등이 각각 공손, 삼감, 용맹, 곧음이 사리를 잃었을 때 나타나는 구차스러움이다.(69~71쪽)
2. 사람 사이에 가고 오는 것을 중요히 여겨라
<예기> '곡례 편'은 "무릇 예란 자기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높이는 것(自卑而尊人)이다"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삼가고 조심하라(謹)는 뜻이다. 그것이 사리(事理)다. 이런 사리의 출발점을 모를 때 일어날 병폐에 대해 공자는 <논어> '이인(里仁) 편'에서 이렇게 경고한다.
"자기 이익에 따라서만 행동할 경우 사람들로부터 많은 원망을 듣게 될 것이다."
이같이 사리로서의 예를 익힌 사람은 평안하고 이런 예를 모르는 사람은 위태로워진다. 그래서 공자는 "예란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고 늘 강조했던 것이다.
한나라 때 바로 이 같은 효근(孝謹)을 몸소 실천해 대대로 평안을 누린 집안이 있다. 만석군(萬石君) 석분(石奮)과 그 자식들이다. 석분의 장남은 건(建)이고 그 밑으로 갑(甲), 을(乙), 경(慶)이 있었는데, 모두 행실이 착하고 효성스러우며 삼가고 신중해 관직이 2천석(二千石-지방 장관)의 지위에 이르렀다. 이에 경제가 말했다.
"석군(石君-석분)과 네 아들들이 모두 2천 석의 지위에 올랐으니 다른 사람의 신하된 자로서 존귀와 총애가 마침내 그 가문에 다 모였구나."
그래서 석분을 만석군(萬石君-다섯 명을 합치면 1만 석이다)이라고 불렀다. 경제 말년에 만석군은 상대부(上大夫)의 봉록을 받았지만 늙음을 구실로 관직에서 물러나와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세시(歲時) 때에는 대신의 자격으로 참가했다. 궁궐 문을 지날 때에 만석군은 반드시 수레에서 내려 서둘러 걸어 들어갔는데, 대로에서 황제의 어가를 보게 되면 반드시 예를 갖추어 경의를 표했다.
비록 하급 관리가 된 자손이라도 집으로 돌아와 만석군에게 인사를 드릴 때면 만석군은 반드시 조복(朝服)을 입고 접견했으며, 함부로 그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자손들 중에 과실이 있으면 직접 꾸짖지 않고 한쪽 방에 조용히 앉아 밥상을 대해도 음식을 먹지 않았다. 이렇게 한 후에 여러 아들들이 과실을 저지른 자를 꾸짖고, 다시 가족 중에 연장자가 옷을 벗어 어깨를 드러내어 굳이 사죄하고 잘못을 고치면 비로소 용서하고 받아들였다. 하인들에게도 늘 온화하고 즐거운 모습으로 대하면서도 각별히 신중하게 행동했다.
황제가 때때로 음식을 그의 집에 내려주면 반드시 머리를 조아리고 몸을 굽혀서 먹었는데 그 공손한 태도가 마치 황제 면전에 있는 것과 같았다. 이를 공자는 여재(如在), 앞에 그분이 계시지 않아도 늘 계신 듯이 하는 태도라고 불렀는데 그것이 예다. 그는 예를 아는 사람이었다. 자손들도 그의 가르침을 따라 역시 똑같이 했다. 만석군 일가는 효도하고 근신함(孝謹)으로 군국에 명성을 떨쳤다. 설령 제나라와 노나라의 여러 유학자들도 만석군의 진중한 행실에는 모두 스스로 미칠 수 없다고 여겼다.(129~132쪽)
3. 곧음은 난세를 잘 살아내는 일의 이치다
<논어>에는 곧음(直)의 문제가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도 있지만 문장이나 문맥의 배후에 작동하고 있는 것도 많다. 그것들을 충분히 이해할 때라야 비로소 곧음이 바로 일의 이치(事理)임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냥 정직이나 직언이라고 할 때의 곧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리의 측면에서 곧음(直)을 말하는 구절은 세 가지다. 먼저 '공야장 편'이다.
공자가 말했다. "누가 미생고(微生高)를 곧다고 하는가? 어떤 사람이 식초를 빌리려 하자 그의 이웃집에서 빌려다가 주는구나."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 하며, 있으면 있다 하고 없으면 없다고 하는 것이 곧음이다. 그런데 노나라 사람 미생고는 굳이 옆집에까지 가서 빌려다 주었다. 남의 평판을 의식하고서 한 행동이기 때문에 공자는 가차 없이 곧지 못하다고 지적한 것이다. 이번엔 '자로 편'이다.
섭공(葉公)이 공자에게 말했다. "우리 당에 정직하게 행동하는 궁이라는 사람이 있으니 그의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그는 아버지가 훔쳤다는 것을 증언하였습니다."
이에 공자가 말했다. "우리 당의 정직한 자는 이와는 다릅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 숨겨주고 자식은 아버지를 숨겨주니 곧음이란 바로 이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공자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이렇게 하는 것이 사리, 곧 일의 이치라는 말이다. 효(孝)가 곧음(直)의 하나가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윗 사람에 대한 충(忠) 또한 당연히 곧음이다. 이렇게 돼야 '옹야(雍也) 편'에서 공자가 말한 곧음(直)이 확 다가온다.
"사람을 사람이게 해주는 것은 곧음이다. 곧음이 없는 삶은 요행히 죽음을 면한 것에 불과하다."
이런 곧음은 곧 위선(僞善)을 물리치는 것이다. 위선은 결국 남을 의식해서 하는 것이지 본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헌문 편'의 대화는 사리에서 행동의 지침으로까지 나아간다.
어떤 이가 물었다. "덕으로 원한을 갚는 것은 어떻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그러면 덕은 무엇으로 갚을 텐가? 원한은 곧음(直)으로 갚고 덕은 덕으로 갚아야 한다."
그것은 곧 남들이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스스로의 원칙에 입각해 덕(德)을 기르고 마땅함(義)에 따라 행동하는 문제와 연결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논어>의 첫머리에 학이시습(學而時習),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와 더불어 다음의 유명한 구절이 3대 강령의 하나로 나란히 배치돼 있는 것이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속으로조차 서운해하지 않을 때라야 진정 군자가 아니겠는가?"(243~24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