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느끼다] 손택수의 '외할머니의 숟가락'
[시를 느끼다] 손택수의 '외할머니의 숟가락'
  • 권정숙 기자
  • 승인 2021.06.30 17: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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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의 숟가락 / 손택수

 

외갓집은 찾아오는 이는 누구나

숟가락부터 우선 쥐어주고 본다

집에 사람이 있을 때도 그렇지만

사람이 없을 때도, 집을 찾아온 이는 누구나

밥부터 먼저 먹이고 봐야 한다는 게

고집 센 외할머니의 신조다

외할머니는 그래서 대문을 잠글 때

아직도 숟가락을 쓰는가

자물쇠 대신 숟가락을 꽂고 마실을 가는가

들은 바는 없지만, 그 지엄하신 신조대로라면

변변찮은 살림살이에도 집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한 그릇의 따순 공기밥이어야 한다

그것도 꾹꾹 눌러 퍼 담은 고봉밥이어야 한다

빈털터리가 되어 십 년 만에 찾은 외갓집

상보처럼 덮여있는 양철대문 앞에 서니,

시장기부터 먼저 몰려온다 나도

먼 길 오시느라 얼마나 출출 하겠는가

마실간 주인 대신 집이 쥐여 주는

숟가락을 들고 문을 딴다

 

‘호랑이 발자국’(2003년 1월 창작과 비평사)

 

외할머니의 숟가락은 반세기 전 우리나라 할머니들의 일반적인 정서인 것 같다. 보릿고개가 있었던 그 시절 대부분의 집에는 먹을 것이 부족했다. 가족의 끼니꺼리도 부족했던 시절에 집을 찾아온 누구에게나 따뜻한 밥 한 그릇 대접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터였다. 그것도 꾹꾹 눌러 퍼 담은 고봉밥은 더 어렵지 않았을까. 누구에게나 우선 숟가락부터 쥐어 준다함은 그냥 숟가락만 쥐여 주었겠는가. 밥을 먹였다는 뜻일 게다. 진성이란 가수의 보릿고개란 노래가 있다. 배고프던 시절 아이에게 배 꺼질라 뛰지 말라는 가사가 요즘말로 웃프다. 그런 시절에는 없는 살림살이에 애들의 배가 꺼지면 또 밥 찾을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하던 때 집을 찾아온 누구에게나 밥을 먹여 보내는 인정이 우리에게는 있었다. 심지어 손님이 체면치레로 밥을 남길까 걱정되어 반쯤 먹었을 때 물어 보지도 않고 아예 국에 말아주는 친절까지 베풀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참으로 따뜻한 정이라 하겠다. 외할머니가 대문을 잠글 때 숟가락을 쓰는 것도 자물쇠가 흔하게 있지도 않았고 도둑도 많지 않았으니 가져갈 것도 별로 없어 그냥 집에 사람이 없다는 표시로 숟가락을 꽂고 마실을 다녔을 것이다. 그래도 시인은 할머니가 누구에게나 숟가락을 쥐여 주니 할머니의 만능물건으로 보여졌나보다. 시인이 찾아간 그날 빈털터리가 되어 먼 길 온 허기진 시인의 눈에는 양철대문이, 밥상을 덮은 상보처럼 보였을 게다. 그러니 시장기부터 몰려오는 게 아니었을까. 할머니는 마실을 가고 없어 집이 대신 쥐여 주는 숟가락을 들고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는 시인의 모습이 그림처럼 그려진다. 참 따뜻하고 정감이 넘치는 한국인의 정서가 질펀하게 시에 녹아들어 훈훈하게 가슴을 데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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