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 시대 후기에서 고려 시대 전기의 석탑
'춘원 이광수 선생'의 소설 속 이야기처럼 먼 옛날, 이 계곡은 거대한 동굴(洞窟 )이었다고 한다. 대지진으로 동굴이 무너지면서 풍혈, 빙혈 구멍이 지금처럼 좁아졌으나 지하는 어떤 형상을 하고 있을는지 신비하기만 하다
‘빙계 계곡의 풍혈과 빙혈에 얽힌’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 이야기가 있다. 신라 무열왕의 둘째 따님인 요석공주가 젖먹이 아들 설총을 데리고 지아비 원효대사를 찾아 이곳 빙산원(빙계 계곡의 옛 이름)에 이르렀을 때 마지막 남은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공주 일행이 사라를 떠나 보현산을 거쳐 조문국(지금 의성군 금성면) 경내에 다다르자, 궁궐터와 임금이 쓰던 우물인 '어정'이 있었다. 동네 어귀에서 원효대사의 거처를 물었더니 빙산사 빙혈 속에 기도하는 이상한 스님이 있다고 일러 주었다.
빙혈을 지나면 찬 바람이 씽씽 불어나오는 풍혈이 있는데 얼마나 깊은지는 아는 사람이 없소. 그 끝이 저승까지 닿았다고도 하지요. 공주는 좁은 굴속을 더듬더듬 기어들어 갔다. 이리 꼬불 저리 꼬불 몇 굽이를 지나 얼마나 들어갔는지 모른다. 점점 추워졌다. 공주는 전신이 꽁꽁 어는 듯하였다. 발이 미끄러지는 곳은 얼음판이었다. 얼마를 들어갔을까? 굴이 넓어졌다. 허리를 펴고 팔을 둘러도 거칠 것이 없다. 공주는 크게 소리쳐 불러 보았다. 아바아! 여보 굴속이 웅하고 울렸다. 울리는 소리가 마치 쇠북 마지막 소리 모양으로 길게 꼬리를 끌다가 스러졌다. (이하 생략)
빙혈 인근에 의성 빙산사지 5층석탑이 있다. 이 탑은 부처의 유골을 모신 조형물이지만, 실제 유골이 없는 경우에도 상징적으로 부처를 모신 곳으로 여겨진다.
석탑에 사용된 돌은 벽돌 크기로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으로 의성 탑리 오층석탑(국보 제77호)을 따라 만들었다. 장식, 크기, 형식으로 볼 때 통일신라 후기 또는 고려 전기 사이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바닥돌부는 1단으로 되어 있다. 1층 몸돌은 네 모서리에 기둥을 세우고 정면에 네모꼴로 된 공간이 있는데, 불상 등을 모셔두는 용도로 쓰였다. 몸돌부는 몸돌, 지붕돌 받침, 지붕돌로 이루어지는데, 이 탑은 다섯 개의 층이라서 오층석탑이다. 지붕 돌받침은 각 사단으로 되어 있고, 머리 장식부는 받침돌만 남아있다. 빙산사지 석탑은 탑리 오층석탑의 양식을 따랐다. 각 부분이 그보다 작고 단조롭지만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