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 비우고 마지막 작품 독도 대작 성공 염원
현봉 화백 ‘내금강의 가을’ 등 연결 병풍 검색 열풍
타고난 재능으로 손수 그린 그림을 팔아 봉사가 몸에 밴 유명 화가가 있다. 겉치레식 봉사보다 가진 것 비우며 봉사가 일상이 된 어쩌면 덤의 여생을 보은으로 사는 사람이다.
심혈을 기울여 그린 작품을 팔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물질과 정신으로 봉사하는 화백 현봉(玄峰) 정수정(68, 대구시 상동) 씨는 이기주의가 만연한 사회에 훈훈한 인정이 살아 있음을 실천하여 삶이 더욱 값져 보인다.
그는 경북 상주에서 완고한 조부모 유교 집안에서 넷째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었으나, 그림쟁이로는 큰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완고한 아버지 반대로 그림을 그리지를 못했다.
학창 시절에는 사물이 온통 그림으로 연관되었고 숙제 공책 뒷면에는 언제나 그림 낙서 흔적으로 채워져 아버지께 혼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대학 졸업을 포기하고 대구의 '월산 예술종합학원'에 아무도 모르게 등록하고 한동안 열심히 다녔는데, 어느 날 아버지께 들켜 혼이 나고 다닐 수가 없었다. 가족들의 만류에도 대구로 뛰쳐나와 방황했던 화백 현봉(玄峰) 선생의 세상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 본다.
파랑 노랑 빨강 백색 4가지 색 키워드로 현봉을 들여다본다.
◉ 파랑-. 천부적 소질
-그림은 언제부터 어떤 그림을 주로 그렸나요?
▶결혼 후 1979년부터 1986년 대구시청에서 7년 공직생활을 했었습니다. 사회과, 복지과, 총무과, 당시에 바빴던 새마을과 거쳐 퇴직했습니다. 그토록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소망 그림쟁이가 바쁜 전성 시즌이 있었습니다. 내 그림이 수요를 못 따라갈 시기도 있었습니다.
‘현봉’ 인터넷에서는 온통 불우이웃 봉사자 화가로 한껏 달구어주었습니다. 결혼하고 독학으로 본격 실경산수 위주로 농촌 풍경을 주로 담았습니다. 요즘 시골에는 호박 덩굴 영그는 초가집들의 정취가 사라지고, 농촌 근대화에 따라 진입로가 아스팔트로 변해 농촌 풍경이 달라져 실경 화가로서는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이후 1988년 서울 올림픽 시즌에 호돌이 마스코트르 계기로 호도(虎圖)를 그렸습니다. 매체를 통해 제 호도 그림을 보고, 가격을 초월한 의뢰와 수요가 많았습니다. 완성품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낙관이 있어 완성이 늦더라도 작품에 신중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현봉 선생 호도(虎圖)는 특유의 눈썹과 털을 초점으로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이 있습니다. 털에 여섯 차례 이상 옷을 입혀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호도를 그리게 된 동기를 말씀해주세요.
▶1988년 서울 하계 올림픽 마스코트로 호돌이가 선정되면서 호랑이 완구가 유행했으나, 그때는 저는 호랑이를 아예 몰랐습니다. 대구광역시 가창 자연농원에 도시락을 들고 찾아가서 종일 호랑이를 공부했습니다. 호랑이 관찰만으로는 터득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호랑이 관련한 책도 보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나오는 이론적 내용을 그림으로 옮겼을 때, 호랑이는 산 중턱에서도 잘 쉬지 않고 바위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을 보고, 아 이렇구나! 영감을 받았습니다. 시중에 나도는 그림을 보면 호랑이 뒤에 대나무 배경이 많이 나오는데 호랑이는 대나무밭에 잘 들어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저도 대나무밭 배경으로 한 시기도 있었지만, 이후로는 있는 그대로 산 정상이나 둥근 달을 배경으로 해서 자태를 구상하여, 멀리 있는 노송과 고목 위주로 그려왔습니다. 호랑이 털은 색상이 다양하므로 옷을 입힐 때마다 마를 때까지 기다립니다.
◉ 노랑 – 떡잎의 사색
- 현봉께서는 그림이란 무엇이며 어떤 의미이며 관계인지요?
▶제 그림은 혼신을 담은 또 다른 자녀이자 분신입니다. 나 이상 더 사랑해주고 좋은 환경에 여식 시집보내는 아버지 마음입니다.
어릴 적 시절에 얘기하면, 저는 화가가 될 거야. 이런 소리를 많이 했습니다. 동무들은 회사 사장이니, 의사니 할 때 저는 그려서 표현하는 화가가 제 꿈이었습니다.
어딜 가나 무엇을 보나 나무 한 그루를 보더라도 왜 이쪽을 뻗을까 그런 사색을 많이 했었다. 돌멩이 하나도 제각기 다르게 변화되는 모습에서 그림에 빠져들게 되었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사물을 관찰하는 호기심이 발동되어 꺾은 나뭇가지를 들고 와서 이런저런 방향으로 혼자 그려보기도 했습니다. “그림은 내 인생의 축소판이다”라고 말하겠습니다.
-현봉 그림은 비싸다는 정평이 나 있던데 호당 얼마나 합니까?
▶호당 가격을 매길 수 있다는데 누가 그걸 매기겠습니까? 제 그림을 찾아주시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사랑한다면 가질 자격이 있고, 나만큼 제 그림을 사랑해주실 때는 그냥이라도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식을 좋은 사람 만나 시집 보낸다는 마음입니다. 그림과 짝은 임자가 있습디다. 좋은 임자를 만나기까지 여식 관리는 아비의 마음입니다.
-향토 문화계 미술 부문에서 현봉 명성이 남달랐습니다. 지역의 미술 수준은 다른 지역에 비해 어떠했나요?
▶같은 구상을 하는 화가가 많습니다. 제 경험입니다만 상대방을 평가 절하하는 이들이 있어, 힘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같이 호랑이를 그려도 시샘이라고나 할까 뒷말이 심하게 들려올 때 미술 문화계 일원으로서 괴로웠습니다. 당시 대구에 화단 수준이 그것밖에 되지 않았어요. 작품 우월을 떠나 내가 세상을 잘못 살고 있나? 성찰하는 시기도 있었습니다.
◉ 빨강- 절망
-칠순을 바라보면서 삶이 힘들었던 적이 언제였나요?
▶2,000년도에 폐암 판정을 받고 절망 상태였습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의욕도 상실한 채, 개인전을 위해 준비한 89점으로 기억됩니다. 작품을 지체장애인 봉사 단체에 모두 기증 했습니다. 모두 내려놓고 비우니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었습니다.
-절망 속에서도 나눔 봉사 실현
▶어차피 한정된 내 인생 마지막 나무 한 그루를 심는 마음 다스리는 뜻으로 청도 운문사 배경을 그렸습니다. 광주 모 방송국 사장님과 인연이 되어 그림을 격찬하며 위로금으로 일천만 원을 쾌척해주셨어요. 100만 원도 뜻밖인데, 당시 일천 만 원은 분에 넘치는 큰돈이었습니다. 이 돈으로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하기로 했습니다.
그제 내린 눈이 얼어붙어 칼바람 부는 혹한이었습니다. 서문시장으로 바로 달려가서 방한용 파카 100벌과 털장갑을 구매하여, 대구역, 동대구역 지하철 주변 노숙자에게 직접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래도 300~400만 원이 남아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보육원과 소년 소녀 가장 현장을 찾아 이불을 전달해 주었습니다. 추가 노숙자를 점검하던 길에, 동대구역 주변에서 나를 알아보고 인사하는 이도 있고, 그 옷을 팔아 끼니를 해결했다며 인사하는 이도 만났습니다.
시설이나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각지대를 찾아 놀아주고 동무가 되어 다음에 찾아올 날을 기약해 줍니다.
- 현봉은 애국자이다
▶ 독도 수호 퍼포먼스 현장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퍼포먼스 행위 예술뿐만 아니라 개인 영상 장비로 직접 촬영하여 전시하는 섬세함도 있다. 지자체 각 구청, 교육청 산하에서 독도 수호 퍼포먼스 행사 의뢰가 오면 일주일 전 예약으로 구청 마당 또는 교정에서 큰 붓으로 퍼포먼스 예술 행위행사를 하여 독도는 우리 영토임을 만천하에 표출하기도 했다.
1980년 초부터 문화 미술 활동과 독도 수호 애국 활동을 병행하였다. LA 영사관, 중국 청도 영사관, 국제 육상 경기연맹 및 외국인과 관광객들에게 독도는 한국 땅이라는 독도 그림이 그려진 전통 부채, 도자기 필병 등 200점씩을 수년간 전달했다.
전국장애인협회 독도 그림 1.000여 점 전달. 전국 아동 시설에 전통 부채와 도자기 연필통에 독도 그림 삽입 수년 전달하여 현재 7.000여 점에 이른다.
현봉 정수정 화백 퍼포먼스 독도 수호에 관련한 방송 출연은, KBS (서울) 세상의 아침. (대구) 좋은 아침. (대구) 당신이 주인공입니다. MBC (대구) 다큐멘터리 이웃. SBS (서울) 6㎟ 등에 출연한 바 있다.
토막뉴스는 상위 4위 방송국에서 수십 회 방영한 바 있다. 봉사가 생활화된 12년이 지나, 2012년 초봄에 또 뇌경색이 정 화백을 덮쳤다.
설상가상이었습니다. 경북 도청에 기증하기로 한 11m 대작(大作) 독도 그림이 아직도 미완성 상태였습니다. 할 일이 많고 갈 길이 아득한데 몸이 예전같이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하늘이 날 시험하는 것 같아 삭발하고 주체하지 못하는 마음을 잡으려 청도 운문사 절에 귀의하였습니다. 주지 스님 기도 시간에 뒤에 앉아 3년 동안 참선하며 쾌유를 빌었습니다.
◉백색 – 희망
-생활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요?
▶의뢰자의 소품은 몇 점씩 그려 드리고 있습니다. 그날의 컨디션이 좌우합니다. 폐암과 같은 고통과 절망스러운 순간이 지나면 더 좋은 선물을 주려고 나를 시험한다고 생각합니다. 폐암 선고를 받고 절망의 순간에 생각이 스쳤습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어려운 이웃과 함께하고 봉사하고 베푼 만큼 나의 지병은 호전되고 있었습니다. 12년을 함께 동고동락한 폐암도 모든 것을 비운 이에게는 더는 해치지 않을 모양이었습니다. 선(善)한 이는 이기지 못합니다.
갑작스럽게 닥쳐온 뇌경색도 자유로운 거동에 불편함도 있지만, 소품들은 그렇게 소화해낼 수 있다고 한다. 기후 변화에 따라 몸 상태는 호전되고 있습니다. “비우니 채워지더라” 큰스님의 법문이 수시로 뇌리에 와닿습니다. 약속한 독도 그림 대작(大作)만큼은 기필코 완성하게 해달라는 염원으로 묵상 중에 기도합니다.
경북 도청 현관에 현봉의 독도 전경 대작이 전시되어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알리는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함께 기원한다.
작가 현봉 정수정은 1980년 초부터 활동 영역이 컸었다. 1981년 한국미술 대상을 받았으며, 1982년 한국 미술대전에서 수상하였다. 2001년 칠곡군 장애인회관 건립 시기에 소년소녀가장을 돕기 위하여 초대전을 가진 바 있다.
◆주요 작품 활동
▷한국 청년 작가 21인 초대전
▷한국 일본 문화(camping) 전
▷동경 미술대전 초대작가
▷현봉 정수정의 작품세계 전(85 상주회관)
▷한국화 대상 작가 초대 개인전(86 제천미술관)
▷단원 미술제 전 초대 개인전(87 서울)
▷한국 정예작가 선정 100전 초대(89 서울)
▷향토 출신 작가 초대 5인전 (90 상주 문화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