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표 브랜드 관광상품 개발과 한방전문타운의 설립 요망
지난 10월 6일부터 대구약령시 개장 363주년을 축하하는 제43회 한방문화축제가 비대면으로 열렸다. 개장식과 각종 체험 행사들이 온라인으로 진행되고 있으나, 약령시 거리에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조선의 실학자 한치윤의 ‘해동역사(海東歷史)’에 의하면 대구는 고려시대부터 한약재를 거래하던 곳이었다. 전란으로 황폐해진 나라에 매년 전염병이 돌아서 백성들이 고생하자 당시 경상감영이 있던 대구에 효종(1658)은 영을 내려 봄, 가을에 한 달씩 약령시(藥令市)를 열도록 한 것이 약령시의 효시다.
당시 약령시는 대구 외에도 청주, 공주, 원주, 대전, 전주 등지에도 설치되었으나 대구약령시가 가장 오랫동안 번성했다. 이는 대구가 조선 후기부터 경상감영의 소재지로 발전하였으며, 소백산과 지리산 등 한약재의 산지들과 금호강과 낙동강으로 연결된 교통의 요지이며 물류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대구약령시는 경상감영의 객사 주위에 설치되었으며, 전국에서 수집된 한약재 중에 상품은 조정에 납품되고 나머지는 일반에 거래되는 한약재 유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약령시는 1908년 대구읍성이 없어지면서 현재의 남성로로 옮겨졌는데, 1910년까지 중국, 일본, 러시아 등지에서 온 상인들과 교역하기도 했다.
대한제국 말기에는 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항일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조달과 연락의 거점으로 탄압을 받아오다가 1941년도에 폐쇄되는 비운을 맞기도 했다. 광복 후 1949년도 약령시가 재개되었으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다시 폐지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오늘날과 같은 한약재 상설시장이 오늘날과 같은 남성로 일대에 열리면서 약전골목으로 불리게 됐다.
이무렵 청마 유치환((柳致環, 1908∼1967) 시인은 통영에서 배를 타고 약령시에 와서 ‘당재(唐材) 초재(草材)를 뜨셨던’ 아버지를 회상하는 ‘大邱에서’라는 시를 지어 발표했다.
1970년 후반에 이르러 3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약령시 부흥의 움직임이 자발적으로 일어나면서, 1978년 약전골목 내 한약업사를 중심으로 대구약령시부활추진위원회’가 발족되고, 제1회 대구약령시 축제가 열렸다. 이를 계기로 매년 5월 대구약령시 한방문화축제가 개최되고 있으며 1982년에는 한약재도매시장이 개장을 하고, 1985년에 한약재상설전시관이 개장되어 현재 대구약령시한의약박물관(문화체육관광부 제1종 전문박물관)으로 이름이 바뀌어 운영되고 있다. 약전골목은 1985년 내무부 고시로 ‘명소의 거리’로 지정되면서 약령시의 역사 및 전통을 재현하게 됐다.
1988년도에 대구약령시는 보건사회부에 의해 전통한약시장 지역으로 승인을 받았고, 사단법인 약령시보존위원회가 설립됐다. 2001년에는 한국기네스위원회에서 최고(最古)의 약령시로 인증을 받게 되면서 대구약령시와 주변 일대는 2004년도부터 유통물류분야 및 한방관련분야에서 최초의 ‘한방특구’로 지정됐다. 2016년도부터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의약품 등(한약) 시험·검사기관으로 새로 지정된 한약진흥재단 품질인증센타가 전문연구진과 첨단분석장비를 갖추어 운영되고 있다.
대구약령시 한방문화축제는 2001년도부터 20회 연속 문화체육관광부 지정 문화관광축제로 선정되어 개최되면서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한방문화의 우수성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대표적인 축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양대석 (사)약령시보존위원회 이사장은 “대구약령시의 보존과 발전을 위하여 대구를 대표하는 문화컨텐츠와 접목된 브랜드 관광상품 개발과 한방전문타운의 설립이 요망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