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의 富貴榮華(부귀영화)가 뜬구름처럼 덧없음을 이르는 말
· 邯(한) : 1. 땅 이름 2. 강 이름 3. 풍성하다 ※ 용례 : 邯鄲(한단)
· 鄲(단) : 1. 땅 이름 ※ 용례 : 邯鄲(한단)
· 之(지) : 1. 가다, 이르다 2. 이, 이것, 지시 대명사 3. ~의 주격 소유격 조사 ※ 용례 : 之東之西(지동지서), 之子(지자)
· 夢(몽) : 1. 꿈 2. 꿈꾸다 ※ 용례 : 夢寐(몽매), 夢事(몽사), 夢想(몽상), 蒙點(몽점), 夢魂(몽혼), 現夢(현몽)
당나라 玄宗(현종) 때의 일이다. 呂翁(여옹)이란 도사가 邯鄲(한단)이라는 곳의 客舍(객사)에서 쉬고 있을 때, 초라한 옷차림의 盧生(노생)이라는 젊은이가 다가와서 고생을 면치 못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그러다가 노생은 졸음이 와 여옹으로부터 베게를 빌려서 잤다. 그 베개는 도자기로 만든 것으로 양 끝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잠들고 있는 동안에 그 구멍이 점점 커졌으므로 노생이 들어가 보니 그곳에는 대궐 같은 집이 있었다. 그 집에서 노생은 청하 최 씨의 딸과 결혼을 하고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관리가 되었다. 계속 출세하여 마침내 京兆尹(경조윤)이 되었고 또 오랑캐를 토벌하여 御史大夫(어사대부) 겸 吏部侍郞(이부시랑)이 되었다.
그런데 그때 재상에게 원한을 산 나머지 端州刺史(단주자사)로 좌천되기도 하였으나 그곳에 머무른 지 3년 만에 다시 소환되어 戶部上書(호부상서)가 되었다. 노생은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재상이 되고, 그 후 10년 동안 천자를 잘 보살피고 선정을 베풀어 어질고 현명한 재상이라고 명성이 자자했다. 이렇듯 그의 지위가 극을 누리고 있을 때 그가 변방의 장수와 결탁하여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터무니없는 참소가 들어와 포박을 당하자 그는 탄식하며 처자에게 말했다. “내 고향 山東(산동)의 집에는 약간의 전답이 있었다. 농사만 짓고 살았다면 그것으로 추위와 굶주림은 면할 수 있었을 것인데 무엇 때문에 애써서 祿(녹)을 구했단 말인가? 그것 때문에 이 꼴이 되어 버렸으니 그 옛날 누더기를 입고 한단의 길을 걷던 일이 생각난다. 그때가 그리우나 이젠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처지이니····.”
노생은 칼을 들어 자결하려 했으나, 아내가 말리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驥株(기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몇 년 후 천자는 노생이 누명을 쓰고 있음을 알고, 서울로 불러 中書令(중서령)에 임명했으며 燕國公(연국공)에 봉하여, 그 은총과 믿음이 대단했다. 그의 다섯 아들은 모두 고관이 되었고 천하의 이름있는 집안과 결혼하여 십여 명의 손자를 두었으며 만년에 그는 무척 행복한 생활을 영위했다. 그러나 건강이 쇠약해져 마침내 죽고 말았다.
이윽고 노생은 크게 하품을 하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 모든 것은 한낱 꿈이었다. 여옹은 그런 그에게 웃음을 띠며 말했다. “인생은 다 그런 거라네.” 노생은 잠시 묵묵히 있다가 이어 여옹에게 감사하며 말했다. “榮辱(영욕)과 貧富(빈부)도 죽음도 모두 경험했습니다. 이것은 선생께서 제 욕심을 막아주신 것으로 생각되는군요. 잘 알았습니다.” 여옹에게 공손히 절을 하고 노생은 길을 떠났다.
지난 26일 지역 出身(출신) 노태우 전 대통령이 享年(향년) 89세로 永面(영면)에 들었다. 정부는 국무회의에서 노 전 대통령의 葬禮(장례)는 國家葬(국가장)으로 議決(의결)하고 5일간 哀悼 其間(애도 기간)을 갖고 오는 30일에 영결식·안장식을 한다고 發表(발표)했다. 葬地(장지)는 유족의 뜻을 받아들여 경기도 파주의 통일동산이 유력하다. 노 전 대통령은 팔공산 자락 대구 동구 신용동 용진마을에서 태어나 지역의 명문 경북고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를 11기로 졸업 후 일선 소대장을 시작으로 군 생활이 시작되었다. 육사 시절 만난 전두환 전 대통령과의 因緣(인연)이 시작되었다.
우리나라 歷史(역사)에 轉換點(전환점)이 된 1979년 12월 12일 노태우 少將(소장)은 당시 9사단장으로 군사 쿠데타에 加擔(가담)하여 5공 정권 誕生(탄생)에 기여하였다. 당시 군사정권은 1980년 5월 18일 광주 民主化(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良民(양민)을 무력으로 鎭壓(진압)하여 무수한 양민이 虐殺(학살)되었다. 그 후 5공 정권에서 要職(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乘勝長驅(승승장구) 하다가 5공 정권이 끝날 무렵 國民(국민)들의 熱火(열화) 같은 民主化(민주화) 요구를 받아들여 6.29선언으로 대통령 直選制(직선제)를 받아들였으며, 제13대 대통령으로 當選(당선)되었다.
재임 기간에 治績(치적)을 살펴보면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開催(개최)하여 우리나라를 국제적으로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 東歐圈(동구권)과의 北方政策(북방정책)은 국제적으로 큰 呼應(호응)을 얻었다. 전국에 아파트 200만 호를 건설하여 서민들의 주택난 解消(해소)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범죄와의 전쟁 선포로 治安(치안) 안정에도 큰 성과가 있었다. 대구에는 지하철 1호선을 承認(승인)하여 교통난 해소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노 전 대통령은 퇴임 후 모든 공개 활동은 하지 않았으며 오랜 기간 持病(지병)으로 고생을 하였다. 노 전 대통령 아들은 광주 5·18 墓域(묘역)을 찾아 수년째 懺悔(참회)를 계속하고 있으며, 2,600억 여 원의 追徵金(추징금)도 完納(완납)했다. 遺族(유족)이 공개한 遺言(유언)은 “특히 5·18 희생자에 대한 가슴 아픈 부분. 그리고 재임 시절 일어났던 여러 일에 대해 過誤(과오)가 있었다면 너그럽게 容恕(용서)해주시기를 바란다” 고 했으며 “歷史(역사)의 나쁜 면은 본인이 다 짊어지고 가겠다. 앞의 세대는 희망을 품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평소에 하셨다”라고 전했다.
한 인간이 平生(평생)을 살다 보면 누구나 功過(공과)가 있을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의 過誤(과오)를 認定(인정)하고 진정성 있는 謝過(사과)와 추징금 完納(완납)으로 국민으로서 責任(책임)과 義務(의무)를 다하고자 努力(노력)한 부분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우리 사회가 包容(포용)의 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이해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한다. 노 전 대통령의 삶을 되돌아보면 한 인간이 자신의 過誤(과오)에 대해 인정하고 眞情(진정)으로 謝過(사과)하고 恨(한) 맺힌 분들의 마음을 풀기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생각하게 되었으며, 人生(인생)의 無常(무상)함을 切感(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