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도 회초리 노름에 종아리가 성할 날이 드문 판국에 이정도 쯤이야
진실한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동할 자신이 없는 할머니다
비록 감골댁이 자식의 생명을 운명에 결부시켜 이쯤에서 요절을 한다 해도 이는 제 놈이 타고난 명줄이 다한 것이라고 자위 했지만 할머니의 입장에서는 또 그런 것이 아니었다. 더 나빠질 것도 없는 동네 사람들과의 관계 또한 아무래도 좋았다. 하기 좋은 말로 원수 같은 여편네의 아들이라 아예 죽일 작정이었단 오해도 감당할 수 있었다. 살인자란 꼬리표가 뒤통수에 주홍글씨처럼 따라 붙는 것 또한 감내할 수 있었다. 그러한 모든 것들은 이제 중요치가 않다 여기는 할머니다.
그간 의원 집과 무당 집을 드나들 때 몸종처럼 노비처럼 살아온 할머니다. 기분이 좋을 때는 그나마 비위를 맞출 수가 있었다. 허나 수가 틀리는 날에는 빌어먹은 강아지만도 못했다. 그날그날 그들의 기분에 따라 발길질에 체이는 것은 저리가라였다. 때리면 맞는 형상으로 물에 빠진 생쥐 같은 몰골로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다. 그렇다고 화를 내거나 그만 둘 수는 없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할 수는 없는 할머니였다. 그만한 일로 할머니는 할머니가 품고 있는 꿈을 접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고모를 위해서도 또 오늘과 같은 앞날을 위해서라도 지독하게 인내하여 살아온 할머니다. 그렇다고 쉽게 잊어버리거나 머릿속에서 지울 수 있는 지난날들은 아니었다.
그 지난한 세월 중에 수가 틀리는 날이면 의원과 무당으로부터 “망할 년! 멍청한 년! 아둔한 년! 그것도 머리라고 달고 다니나? 사람 머리라고 다 사람 머리인 줄 아는 갑네! 내년의 머리는 머리가 아니라 사람이라 구색을 맞춘 폼인 거여! 장식품이야!”하는 따위의 소낙비가 내리는 듯 퍼부어 내리는 비아냥거림은 그래도 낳은 편이었다. 어떤 때는 동쪽에서 맞은 뺨을 서쪽에서 화풀이 한다고 분기가 탱천했는지 입에 담기도 민망한
“칠칠맞지 못한 팔푼이 같은 년! 부엌 때기가 집구석에 들어 앉아 밥주걱 칼춤에 밥이나 할 것이지 방티(함지박)만한 궁둥이를 살랑살랑 흔들어가며 골목골목을 누비길 어째서 누비나? 어떤 골 빈 사내를 꾀어 멀쩡한 집구석 요절을 내려고 발정 난 암캐모양 암내를 폴폴 풍겨 나돌아 다니길 다니나? 싸구려 홍등가를 드나드는 술집 작부도 아닌 것이 어디 할 짓이 없어 화냥년 같이 헤픈 웃음을 늘 상 입가로 흘리며 싸돌아다니긴 싸돌아다녀!”할 때는 어디다 머리를 처박아 죽고만 싶었던 할머니다. 외간 남자와 옷깃 한번 스친 적이 없는 할머니가 생뚱맞게 똥갈보 취급을 당하는 데는 그만큼 가슴속으로는 억울함과 원통함이 녹아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점차 이력이 붙자 아무렇게 싸질러 붙이는 욕설 따위 등등은 그저 견딜 만 했던 할머니였다. 오히려 무쇠가 강철로 거듭나기 위한 담금질 정도로 여긴 것이다. 월사금도 없이 공으로 배우는 설움쯤으로 여겨 밟아도, 밟아도 되살아나는 잡초와 같은 은근과 끈기로 참아낸 할머니였다. 꼬박꼬박 월사금을 바치는 학생들도 회초리 노름에 종아리가 성할 날이 드문 판국에 이정도 쯤이야 예삿일로 여긴 할머니였다.
용케도 견뎌온 그 지난 세월을 할머니는 오늘을 위해 참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까닭에 만약 할머니가 눈앞으로 맞는 처녀 진료에 실패를 한다면 실패한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다 여기고 있었다. 그것은 죽음보다 더 고통스럽다 여기고 있었다. 이는 할머니의 진료가 결국 고모의 생명과 동일 선상에 있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극단적으로 고모의 죽음이라 여기고 있었다. 이 아이의 생명이 고모의 생명이란 생각에 사로잡힌 할머니다. 감골댁과의 관계 따위는 이미 머릿속에 하얗게 지워진지 오래였다. 그런 까닭에 할머니의 고심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깊어지고 있었다.
문득 할머니의 손끝으로 무언가가 꿈틀거려 움직인다는 느낌이 전해져 온다. 마침내 해결의 실마리가 잡히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미미한 것이 점차 또렷해진다. 처음 맥을 잡아내기가 어렵지 이미 잡힌 맥은 그 숨결의 힘차기가 폭포수와도 같다. 이는 의술이란 것도 다 통계학이기 때문이다. 이미 밝혀진 의술은 그대로 받아들여 충실하게 따르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그걸 찾아내기까지의 과정이 어렵고 힘들다. 지독한 예습과 복습은 물론 뛰어난 스승이 필요한 것도 다 이 때문이다. 게다가 세균이란 몹쓸 놈도 점차 진화를 거듭한다. 또 다른 병을 끝임 없이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런 까닭에 고리타분하게 과거의 통계에만 목을 매고 있을 수많은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사람도 이들의 진화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의술의 발전을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현재 그것이 또 다른 두려움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함부로 속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생명을 다루는 일이라 조그마한 실수조차 용납할 수가 없어 더욱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하기 때문에도 더 그렇다.
진맥에서 어느 정도 확신을 한 할머니가 이 시점에서 가장 두려워하고 염려스러운 점은 아무래도 오진이다. 만약 오진으로 인해 아이의 병세를 그르치는 것은 고사하고 고통만 가중될 때는 환자를 돌보는 사람으로서 그 죄악은 또 어떻게 감당해야 할 것인가?의 벽에 봉착한 것이다. 그러다가 막판에 몰려 목숨까지 잃는다면 그것이 더 큰일이라 여겨지는 것이다. 그럴 때 당당하게 오진이라 자신의 입으로 명명백백 밝힐 수가 있을까? 아니면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어야 할까? 고민스럽다. 하늘을 속이고, 땅을 속이고, 세상 만물을 다 속여도 자기 자신 만은 속일 수 없는 것이 세상 이치라 더 두려고 무섭다 여기는 것이다.
편두통으로 머리가 쪼개질 듯 아픈 조조 앞에서 머리 수술을 주장한 화타처럼 죽음을 초월할 수 있을까? 천하의 조조 앞에서 머리를 갈라야 한다고 주장한 화타는 그 자리에서 죽음을 당했다질 않는가? 또한 고대 중국 최초의 여의사 허작처럼 원수를 눈앞에 두고도 살신성인의 마음으로 살려낼 수가 있을까? 본래 허작은 원수를 갚기 위해 의술을 배웠다질 않는가? 원수의 아들이 어느 때 병을 얻는 기회를 포착하여 진료를 자청, 복수하기 위해 배웠다질 않는가? 그런 그녀가 원수 갚기를 포기하기까지 얼마만큼의 가슴앓이를 했을까 싶은 것이다. 그러한 일련의 역사가 할머니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다.
지금 손끝으로 감지되는 그대로 병명으로 인식하여 치료에 나설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러고 보면 할머니도 겉으로는 담담한 척하지만 여전히 가슴속에는 미움으로 똘똘 뭉쳐진 앙금이 남아 있는 것이다. 나약한 인간이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 할머니다.
그래서인가 진실한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동할 자신이 없는 할머니다. 남녀가 유별하여 손목을 묶은 비단실을 통해 전해오는 미미한 숨결에서 병명을 짚어내는 어의나 신의는 아니지만 지금 할머니의 손끝으로는 아이의 배는 이래서 아픈 것이요! 어서 사실대로 말하고 치료를 하시오! 하고 재촉하고 있다. 미운 앙금 때문에 계속 이렇게 방치해 둘 것인가? 묻고 있다. 미운털이 박히고 미운정이 가슴에 철철 넘쳐나서 망설이고 있는가? 질책하고 있다. 곧장 가슴이 콩닥거려 던져오는 질문에 화답하기 가 곤란한 듯 할머니는 아이의 배를 지그시 눌러서 재차 상태를 살핀다. 그 느낌이 할머니의 손끝에서 처음과 다를 바 없다.
지금 아이의 배속 상태는 흡사 여울로 모여드는 물고기 때의 형상과 같다. 말라비틀어진 젖꼭지를 물고는 배가 고프다고 젖을 보채는 어린아이의 투정과도 같다. 이럴 때는 달달한 것을 주어 달래는 것이 최고의 상책이다. 마침내 할머니의 얼굴에 만족한 미소가 번지고 일각에도 채 못 미쳐 아이의 배에서 손을 뺀 할머니는 모잽이로 누운 아이의 머리를 돌려 눈을 까뒤집어 보고는 작정을 한 듯 감골댁을 향해
“설탕이 있으면 설탕물을 좀 만들어 주게! 아니면 꿀물이라도”하고 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