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을 들려 사발에 물을 떠오는데 내 집을 드나드는 듯하다
부지깽이로 오뉴월 복날 개 패듯 때려 주이소
“이렇게 고마울 데가 있나! 내 저늠아 장가만 들 수 있다면 이 늙은 게 무슨 소원이 더 있겠는가? 내 눈에 흙 들어가기 전에 저~넘! 저 자슥 장가보내는 게 평생에 포원이 졌네! 지난 세월의 잘잘못은 딱지 접듯 접어두고 지금이라도 감골댁이 원한다면 내 머리칼을 뽑아 미투리를 삼으라면 삼겠네! 내 진심으로 부탁하네! 좀 알아봐 주게! 나는 겉으로만 사람형상으로 눈이 있으되 당달봉사나 다름없고, 다리라고 있으되 앉은뱅이와 다름없어서...! 시방 내 꼬라지가 이 모양일세! 자네 말마따나 인귀상반이라고 귀신형상이나 다름없지만 감골댁이 원한다면 시방이라도 땡빚을 내서 녹의홍상 한 벌 장만하겠네! 아니지 그보다는 삼회장저고리에 목단 꽃 곱게 수놓은 치마에 옷이라도 한 벌 지을까? 그깟 놈의 빚을 좀 지는 게 대순가? 아니면 옥가락지를 원하나? 혹 원하는 게 있으면 속에 넣어 끙끙 앓지 말고 속 시원하게 말해보게!”하는 할머니는 하늘을 한번 쳐다보고는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나도 그동안 두 서너 차례 중매를 서고 또 성사를 시켰건만 어째 내 며느리다 싶으니까 당체 갈피를 못 잡겠네! 우리가 좀 났다 싶으면 내가 싫고 저 쪽이 좀 났다 싶으면 욕심은 나지만 지레짐작으로 버버리(벙어리)가 되어 버리니 말이야! 게다가 과거지사나 병신인 딸을 들먹일 때는 손발을 놓을 수밖에...! 남들은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달짝지근한 말로 잘도 구슬리드만 나는 당체 입이 떨어지지가 않네! 숙맥이라 어리숙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이기적이고 간사해서 그러는지! 나는 모르겠네! 진정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네!”하고 신세타령을 하던 할머니는 감골댁이 들고 온 광주리를 내려다보다가 개밥에 도토리 모양 곁눈도 안주던 감자를 하나 집어 덥석 입에 물고는
“간도 어지간히 간간하게 배인 게 입에 착착 감기네! 어째 감골댁은 하는 일마다 손끝이 짭찔맞아 맛나게도 삶았네!”하더니 뜨악한 표정으로
“그런데 이걸 왜? 자네 집에도 입이 여럿이라 애지간해서는 모자랄 건데! 있는 게 한정일 건데! 자네나 나나 수채에 구불(구르다의 방언)러 댕기는 한 톨 쌀알도 아까운 판에...!”
하며 가슴을 두드려 가며 또 한입 베어 물어 우물우물 넘기고는 목이 메는지 주먹으로 가슴을 탕탕 두드린다. 이는 다분히 감골댁의 비위를 맞추고자 아부가 섞인 행동으로 보였고, 아버지의 장가란 말에 녹아난 할머니는 감골댁 앞에 지난 세월을 잊었노라 시위를 하는 것으로도 보였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약해만 지는 할머니다. 게다가 아버지의 색시 감이란 말에 퍽석 엎어지는 형국이다. 평소 너 죽고 나 죽자고 앙앙불락 도끼눈으로 뒷모습을 노려보던 때가 언제 있었나 싶은 표정이다. 그저 수굿하게 머리 숙여 처분을 기다리는 형상이다. 보다 못한 감골댁이 심히 송구스럽다는 표정으로
“아이고 성~님 왜 이러세요! 그 일이야 시간을 두고 차차 수소문하면 어떻게 구체도리가 생길 겁니다. 설마 저토록 헌헌장부를 총각귀신으로야 만들겠습니까? 인제부터 이 감골댁이 두루두루 알아볼게요! 하니 안심 하이소! 그러니까 맘 편하게 잡수시고 조금만 기다려 주이소! 그리고 좀 천천히 드세요! 그렇게 급하게 드시다가는 목 막혀요! 체해요!”하더니 부리나케 부엌을 들려 사발에 물을 떠오는데 내 집을 드나드는 듯하다. 눈에 훤하게 꿰고 있는 듯하다. 전날만 해도 어림도 없었겠지만 순한 양처럼 사발로부터 한 모금 물을 들이켜 목이 트인 할머니가
“고맙네! 고마워!”하고는 문득 생각나는 무언가가 있는 듯 감골댁을 향해
“우리 집 부엌 살림살이를 그새 잊자 뿌지도 않았나? 그리고 자네가 시방 ‘성~님’이라 했는데 누굴 보고 하는 말인가? 그리고 보니 지난번 자네 집에서도 얼핏 그렇게 부르는 것 같은데...!”하는 할머니를 향해 감골댁은 양손을 맞잡아 비벼가며
“성님 부엌이야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뭐 있습니까? 늘 똑 같아 한 눈에도 훤하지요! 그깐 세월이 뭔 대순가요! 그보다도 성~님은 왜 그러세요! 멀쩡한 머리칼을 무닥지 뽑기는 왜 뽑아요! 그리고 미투리는 무슨...! 가당치가 않습니다. 아서요! 죄에다 악업을 얹어 이 감골댁을 아예 천하에 악녀로 지옥 불에 쳐 넣으려고 작정을 했습니까? 죄는 미워도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고 이 감골댁에게도 한 번 쯤은 속죄의 기회는 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하지만 성님이 그렇게 오해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지요! 이 오살 맞아 죽을 년이 지금껏 그렇게 행동해 왔으니까요! 맞아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은 없지만 서도...! 그래도 오늘 만큼은 모든 게 진심이네요! 참이란 말이 예요!”하고 고개를 숙이는가 싶더니 다시 말을 잇는다.
“성~님! 옷은 또 무슨 옷입니까? 지가 언제 성님께 옷을 바라던가요? 옷이란 ‘옷’자를 입에 담기는 했지만 그건 혹시나 마음에 담아 두실까 싶어서 미리 입막음 한다는 것이...! 혹 그렇게 들렸다면 참말로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하지만 진정 섭섭하네요! 하기사...! 그리고 옥가락지는 또 뭔 말입니까?”하더니 비장한 각오를 다지는 듯 크게 한번 숨을 들이 쉰 감골댁이
“성~님! 이 자리에서 성님이란! 나는 당연히 아니고 그럼 또 누가 있겠어요! 여기 내 앞에 앉아 계시는 성님뿐이질 않습니까? 여기에 또 누가 있다고 그러세요! 끝순네가 나보다 한참이나 연배잖아요! 근께 할머니는 아직 그렇고 그러니까 당연히 성님이지요! 그래 이 베라쳐 먹을 감골댁은 앞으로 죽는 날까지 끝순네를 성님으로 모시기로 했습니다. 도원결의의 맹세처럼 말이 예요! 나도 이틀 동안 반성 많이 했었어요! 앞으로는 결단코 남을 헐뜯는 그런 인간 말 종 같은 언행이나 행동은 다시 않겠다고 다짐했지요! 성님이 뭐라 해도 소용없어요! 그러게요! 불미스러웠던 지난 과거지사는 오늘로써 다 잊자 뿌이소! 그간 감골댁이란 미친개에게 물렸다 생각 하시소! 그리고 예전처럼 성님 동생으로 지내 보이시더 성~님!”하며 불쑥 손을 내밀어 온다. 그러자 할머니는 뜬금없이 이 무슨 소린가 싶어 감골댁의 손을 흉물스러운 독사가 달라붙는 듯 놀란 몸짓으로 황급히 뿌리치며
“아니~ 아니야~ 그게 아니지! 내 감골댁이 우리 아들 색시 자리를 알아 봐 준다는 말은 천금을 준다는 말처럼 진정 고맙고도 고맙지만 내 까짓 게 감골댁에게 성님은 무슨 성님! 가당치가 않네! 나는 감골댁에게 그럴 자격이 없네! 특히나 자네 입에 나오는 그 성님이란 소리는 전혀 듣고 싶지 않네! 나도 이제 이 생활이 몸에 익어 선지 그리 불편하지도, 외롭지도 않네! 오히려 이 꼴, 저 꼴의 세상사 험한 꼴을 죄다 게워 내듯 조용해서 좋네! 게다가 이것도 도(道)라면 도라꼬 세상과 동떨어져 살다보니 심신수양이나 수도에는 아주 그만이라 오히려 내가 감골댁에 감사할 판이네!”하며 일 없다는 듯 양손을 흔드는데 감골댁이 재차 할머니의 손을 붙잡아오며
“성님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는 것은 당년하지요! 성님을 모진 세월로 몰아넣은 이년의 모가지 위의 머리는 폼으로...! 장식품으로...!, 그저 마구잡이로 아무 생각 없이 주동아리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인 이 년이 그저 쳐 죽일 년입니다. 허니 성님께서는 딴 소리 하지 마시소! 이제부터는 성님으로! 성님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할 것이고 또 열길 불 속에 뛰어 들라면 뛰어 들것이 구만요! 이런다고 깊게 골진 상처가 쉬 아물어 친동생처럼 될 수도, 못을 박았다가 뺀 자리처럼 과거지사를 물로 씻어낸 듯 깨끗하게 지울 수는 없겠지만 그렇더라도 친 동생처럼 여겨 주이소! 그도 저도 성에 안 차면 만날 때마다 ‘요 몹쓸 년! 요 베라 처먹을 년!’하고 부지깽이로 오뉴월 복날 개 패듯 때려 주이소! 그렇게 해서라도 성님의 마음속에 응어리진 앙금이, 분이 풀린다면 마음껏 푸소!, 원망 같은 건 안 할 게요! 동생은 이제 그래 살기로 다짐했습니다. 하늘을 두고 천지신명께 맹세 했습니다요! 혈서를 쓰라면 얼마든지 쓰지요!”하고 할머니의 입을 막는다. 이어진 감골댁의 말에 의하면 할머니가 시킨 대로 다음날로 식구 수대로 구충제를 사다 먹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