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까지 봉강리(경북 상주시 외서면)는 부잣집 몇 집은 기와집이었지만, 대부분의 농가는 초가집이었다. 초가집은 일 년에 한 번 새로 지붕을 이엉으로 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듬해 여름 지붕을 덮은 볏짚이 썩어 비가 샜다.
가을에 벼 탈곡 작업이 끝나면 남자들은 추운 날씨에도 양지바른 쪽에 앉아서 며칠 동안 이엉을 엮었다. 엮은 이엉은 둥글게 감아서 마당 구석에 쌓아 놓았다. 봄에 지붕을 이는 농가는 이엉 더미를 볏단 낟가리 같이 쌓아 보관하였다.
지붕을 다 덮을 만큼 이엉을 엮으면, 친척 이웃 간에 서로 품앗이로 지붕에 이엉을 이는 날을 잡아서 새 이엉으로 지붕을 이었다.
먼저 사다리를 놓고 지붕에 올라가서 용마름을 벗기고, 지붕의 이엉이 썩어 움푹 들어간 곳의 이엉은 벗겨 냈다. 많이 썩어서 지붕에 골이 파인 부분은 밑 부분까지 파내는데, 물기가 있는 까맣게 썩은 것이 땅에 떨어지면 엄지손가락보다 더 굵은 굼벵이가 많았다. 이날은 집에서 기르는 닭들이 보신하는 날이다. 파인 곳에는 짚단을 올려 단단하게 땜질을 하였다.
지붕 꼭대기에서 사방 처마 끝으로 일정 간격으로 여러 가닥의 굵은 새끼줄을 내려놓고, 사람보다 더 큰 이엉 뭉치를 어깨에 메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 지붕 꼭대기에 다 올려놓았다. 이엉 밑부분이 처마 끝과 일치하도록 한 바퀴 돌리고 나면, 사다리를 놓고 올라서서 미리 늘어뜨려 놓은 새끼줄을 이엉 위로 올려 내려가지 않도록 새끼줄을 묶었다. 다음은 이엉의 끝부분이 처마 끝으로 30cm 정도 밖으로 나가도록 지붕을 한 바퀴 돌린 다음 이엉이 내려가지 않게 긴 짚으로 몇 군데 새끼 줄에 묶었다. 다음부터는 조금씩 위로 올려 계속 빙빙 돌려서 지붕을 덮는데, 지붕 꼭대기 이엉은 포개지도록 덮었다.
이엉이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굵은 새끼줄을 사방 처마 끝으로 일정 간격으로 내려 서까래에 박힌 못이나 철선에 묶었다. 옆으로도 일정 간격, 즉 가로 세로를 동여매었다. 지붕 꼭대기엔 새로 엮은 용마름을 올려 단단하게 묶었다. 큰 대나무 빗자루로 지붕 전체를 위에서 아래로 말끔하게 쓸어내렸다. 사다리에 올라서서 처마 밖으로 나온 이엉을 처마 끝과 같이 낫으로 깨끗하게 자르면 모든 작업은 끝이 났다.
안채, 사랑채, 대문간, 잿간 등 여러 채의 집이 있는 농가는 종일 걸렸다. 지붕을 새로 덮으면 농가의 큰일은 어지간히 끝이 났다. 지붕을 새로 덮으면 보온이 되어 방안이 더 따뜻한 것 같았다. 흙벽돌을 찍어서 쌓은 담장은 2~3년마다 용마름을 엮어 담을 덮었다.
70년대 초 ‘잘살아보세, 잘살아보세, 우리도 한 번 잘살아보세’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운동’이 전국적으로 불같이 일어났다. 동민들이 서로가 양보하여 담장을 안으로 들여 쌓으며 마을 안길 넓었고, 시멘트와 철근을 지원받아 좁은 도량에 시멘트 다리를 놓았다. 매년 새로이어야 하는 초가지붕을 슬레이트와 시멘트 기와로 지붕을 개량하였다.
슬레이트 지붕개량은 초가지붕의 이엉을 모두 벗겨 내고 일정 간격으로 각목을 걸치고 서까래에 못을 박아 고정시켰다. 슬레이트를 올려 각목이 있는 부분에 슬레이트 못을 박으며 슬레이트로 지붕을 다 덮고 함석으로 만든 용마름을 덮으면 끝이 났다.
시멘트 기와 지붕개량은 이엉을 벗겨 내고 준비한 진흙을 지붕 위에 올려 놓았다. 진흙을 놓으며 기왓장을 처마 끝과 같이 한 장 한 장 놓으며 한 바퀴 돌렸다. 두 번째 줄은 진흙을 놓으며 밑의 기왓장과 겹치게 놓았다. 세 번째 줄, 네 번째 줄, ... 기왓장을 놓아 돌리고 돌려 지붕을 다 덮으면 용마름은 여러 장의 기왓장을 겹치게 올려 덮었다.
72년도부터 재배하기 시작한 통일벼는 쌀은 일반 벼보다 두 배가 더 생산되었지만, 볏짚은 부드러워서 사용할 수가 없었다. 슬레이트 지붕 개량을 하지 않았다면 통일벼 재배면적 확대는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요즘 초가지붕은 민속 마을에서나 볼 수 있고, 슬레이트 지붕은 농촌에 많이 남아 있는 실증이다. 슬레이트는 발암물질이라 취약계층은 슬레이트 지붕 철거비용을 지원하여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