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봉강리(경북 상주시 외서면)에서 태어난 이용균(64)씨. 농촌에서 어린 시절 어렵게 살아왔다. 용균 씨 아버지는 젊을 때 뽕나무에 올라 뽕을 따다가 떨어져 많이 다쳤으나 치료를 제때 받지 못하여 고생하셨다. 큰 황소를 키우며 농사를 지었으나 일을 못 하셔서 초등학교 때부터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하며 일하였다. 열일곱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할머니가 힘드셨고, 어머니가 오 남매 키우고 공부시키고 결혼시키는데 많은 고생을 하셨다. 새마의 집이 좁아서 기말기 들의 뽕밭에 외딴집을 직접 지어 이사를 왔다. 여기서 결혼하여 신혼살림을 시작 논밭 몇 마지기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였다. 통일벼 재배로 수량이 많이 나고 농가 희망 전량 수매를 받았고, 쌀밥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살기 좋은 농촌이 되었으나 벼농사만으로 살아가기가 어려웠다.
85년 잘사는 농촌을 만들기 위하여 봉강리의 형들과 같이 전국 여러 곳의 선진농가를 견학하였다. 비닐 농사가 소득이 높다는 결론이 났다.
길윤균 씨, 이대재 씨, 김광식 씨, 정재명 씨, 길용균 씨 등 형들과 같이 오이를 재배하여 수출하는 상주원예조합 회원으로 등록하였다. 86년 500평에 단동 비닐하우스를 지었다. 몇 년은 무가온 재배하였으나 처음 재배라 어려웠다. 정철의 길윤균 씨가 처음으로 연동비닐하우스를 시설하여 온풍기를 설치 겨울 오이 재배를 시작하였다. 90년 겨울에 내린 폭설로 하우스가 내려앉아 오이 재배를 그만두는 형도 있었다. 비닐하우스 속의 작업이 힘들다 보니 다른 형들도 원예 조합 회원을 탈퇴하고 92년 배나무를 심어 배 과수원을 시작하였고, 몇 년 후 윤균 형도 양봉을 시작하였다. 그래서 오이 재배는 혼자만 하게 되었다. 혼자 재배하다 보니 매일 수확한 오이를 원예조합에 가저가야 하는 불편함도 있었다.
겨울에 출하되는 오이의 가격이 높아 단동 하우스에 온풍기를 설치 오이 재배를 하였다. 오이를 몇 년 재배하다 보니 기술이 축척되어 소득이 높아 갔다. 아내를 설득하여 농협에서 융자를 받아 1,000평에 상주형 연동비닐하우스 시설을 하고 온풍기를 가동하여 10월 중순에 정식하고 6월 하순까지 수확하는 겨울 오이 농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상주형 연동 하우스는 중간에 기둥이있어 경운 정지작업이 불편하였다. 12년에 지금의 연동 하우스 시설을 하면서 면적을 1,270평으로 확대하였다.
처음에는 오이씨를 사다가 모를 키워 정식 하였으나 일이 많아 밑거름을 넣고 비닐피복 등 포장 준비가 되면 육모 공장에서 오이 모판을 사다가 10월 중순에 정식하고 관리한다. 제대한 아들 진웅 군이 몇 년 전부터 아버지를 도와 일을 하면서 대를 이어 오이 농사를 계속할 것이라고 다짐을 하였다.
12월 중순 첫 수확을 시작하면 내년 6월 중순까지 수확한단다. 요즘은 매일 25kg 상자 20여 개를 수확하지만, 내년 3~4월에는 매일 40여 개를 수확할 것이란다. 규격에 맞는 상품의 오이를 생산하기 위하여 매일 수확 원예조합 공동법인에 가져가면, 특상, 상, 중, 하로 공동선별하여 박스 포장하여 서울 경기 등으로 출하한다.
겨울의 난방비(유류대)가 이천여 만 원, 곁 비닐피복 비용(5년 사용) 일천오백여 만 원, 속 비닐피복비용(매년) 팔백여 만 원, 비료, 농약대, 고용 인건비 등 재료비를 다 제거하면 소득은 년 육천에서 칠천만 원 정도로 가족들의 인건비 정도라고 하였다.
비닐하우스 속의 작업은 힘들지만, 일반 농사보다는 소득이 높아 경험이 있는 오이 재배를 계속할 것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