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박상영은 1988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학교 프랑스어문학과,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16년 문학동네 신인상에 단편소설 ‘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가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허균문학작가상, 신동엽문학상, 젊은작가상 대상을 수상했다.
이 책은 우리와 하나도 다를 것 없는 평범한 30대 사회인 소설가가 꿈이나 목표 같은 것은 사치가 되어버린 우리에게 건네는 작은 위로와 응원의 목소리를 담은 에세이다.
목차는 ‘01 출근보다 싫은 것은 세상에 없다, 02 비만과 광기의 역사, 03 살만 빼면 괜찮을 것 같은데요?, 04 청첩장이라는 이름의 무간지옥, 05 내 슬픈 연애의 26페이지, 06 최저 시급 연대기, 07 내가 선택한 삶이라는 딜레마, 08 그토록 두려웠던 일이 벌어지고야 만, 그날, 09 누구에게나 불친절한 김 반장, 10 너무 한낮의 퇴사, 11 유전, 그 지긋지긋함에 대하여, 12 뉴욕, 뉴욕, 13 대도시의 생존법, 14 플라스틱의 민족, 15 제발 다리 좀 내리라고!, 16 이를테면 나 자신의 방식으로, 17 부산국제영화제, 18 레귤러핏 블루진, 19 내 생애 마지막 점, 20 하루가 또 하루를 살게 한다’로 되어 있다.
(...) 퇴근을 한 뒤 서너 시간 남짓 회사 근처의 카페에서 글을 쓰고 집에 돌아오면 자정이 다 된 시간. 씻고 침대에 누우면 참을 수 없을 정도의 허기가 몰려온다. 자제해야지, 오늘 밤은 기필코 굶고 자야지, 마음먹어본다. 하지만 애써 눈을 감아도 허한 느낌 때문에 도저히 잠이 오지 않는다. (...) 결국 나는 핸드폰을 들어 배달 앱을 켜고 만다. 오늘의 메뉴는 순살 반반 치킨. 50분 뒤 내 방 안에 찾아드는 고소한 기름의 향. 고독하고도 따뜻한 인생의 맛. 도대체 내가 왜 웃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시시껄렁한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치킨 한 마리를 해치우면 비로소, 내가 그토록 바라던 잠이 오기 시작한다. 지금 바로 누우면 어김없이 위산이 역류할 거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지만, 쏟아지는 졸음을 참을 수는 없다. 지금 자지 않으면 내일 출근도 어림없을 테니까. 나는 기어이 침대에 눕고 만다. 내일 밤은 기필코 굶고 자야지, 생각하면서. (018~019쪽)
거리에 나설 때만 해도 오늘은 기필코 운동을 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안고 있었다. 하지만 헬스장이 가까워져 오자 가방끈을 꽉 잡고 있던 손이 느슨해져갔다. 어제도 빠졌으니까 오늘은 꼭 가야 하는데. 근데 목 뒤가 왜 이렇게 뻐근하지? 허리는 또 어떻고. 오늘 업무가 좀 빡세긴 했어. 이렇게 경직되고 피로한 상태에서 운동을 하면 다칠 확률이 높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것 같아. 효율이 떨어지고 근손실도 심할 게 분명해. 일주일은 7일이고 그 중에서 딱 사흘, 사흘만 운동하면 되니까 오늘 정도는 제껴도 돼. 내일이 있잖아? 그렇고 말고.
나는 방향을 선회해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갑자기 가방이 가벼워진 것 같고 아팠던 목도 가뿐했다. 괜히 기분이 좋아져 콧노래가 나왔다. 운동도 하지 않았으니까 오늘은 기필코 야식을 먹지 않겠다는 일념 하나로 퇴근 버스에 올라탔다. (023~024쪽)
내 좁은 방에는 M 사이즈부터 XXL 사이즈까지 엄청나게 많은 티셔츠와 속옷이 발 디딜 틈 없이 자리하고 있다. 폭식과 다이어트를 반복하며 족히 100킬로그램은 찌고 빠진 몸을 감당하기 위해 마구잡이로 사들인 싼 옷들이다. 패스트패션의 풍토 속에 함부로 사서 입고 버려지는 옷들이 얼마나 큰 공해인지 이제는 상식으로 모두가 알고 있다. 나 역시도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지만,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옷 더미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는 것도,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싼 옷을 사는 습관도 멈출 수가 없다. 때때로 나는 그저 먹고 소비하기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만 같다. (179~180쪽)
나는 나의 비좁은 원룸이 커다란 죄의식의 전당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발등에 떨어진 급한 마감의 불을 끄고 나니 지금 내 책상 주변은 온갖 일회용 용기와, 눈에 보일 만큼 많은 수의 초파리들, 옷 무덤과 읽지 않은 책들로 가득하다. 나 하나 살자고 이렇게나 많은 쓰레기를 만들어내고 있다니. 그리고 심지어 그 몸조차도 제대로 건사하고 있지 못하니 이게 다 무슨 짓인가 싶다. (180쪽)
작가 데뷔 초만 해도 책 관련 행사가 있을 때면 마치 중견기업 영업직 사원처럼 칼정장만을 고수하곤 했었다. 독자를 접할 기회가 적었을뿐더러, 매 순간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최고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그런데 하루가 다르게 살이 찌고 입을 수 있는 셔츠가 점점 줄어들면서부터 그런 원칙이 무너졌다. 외적인 모습에 최선을 다한다는 게 어느 순간부터 일종의 허상처럼 느껴졌고, 내가 지금껏 가져왔던 쓸데없는 자기 강박의 연장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매분 매초 더 나은 가치 기준을 만들어내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최선이라는 것이 존재할 리 없다. 시상식도, 북토크도 일종의 축제(?)이자 잔치인데 즐기라고 있는 거 아니겠어? 포멀한 정장이 원칙인 행사 장소를 제외하고는 그냥 편한 옷을 입고 다니기로 마음먹었다.
꽉 끼는 정장 바지에 가로 주름이 간 것을 신경 쓰는 대신 내가 하는 말이나 태도, 내게 주어진 마이크에 신경 쓰는 것이 작가이자 강연자로서 더 나은 선택이지 않을까? 그것이 비록 기성복 상점에서 옷을 살 수 없게 된 내가 하는 자기합리화일지라도 말이다. 그래, 양질의 토크를 하는 게 중요하지 복장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겠어(물론 내가 아무렇게나 쏟아내는 말이 양질인지는 생각해볼 문제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또다시 굶고 자야지 다짐하면서, 결국에는 실패할 것을 알지만 나 자신과의 화해를 시도하는 중이다. (192~193쪽)
통장 잔고가 바닥났음에도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지 못했던 어느 우울한 날, 나는 마치 관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회사 생활이 아주 조금 그리워지기도 했다. 그리고 (모두가 이토록 치를 떠는데도 불구하고) 기업과 노동이라는 시스템이 왜 이토록 오랫동안 존속되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싫은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억지로 만들어지는 루틴이 때로는 인간을 구원하기도 한다. 싫은 사람일지언정 그가 주는 어떤 스트레스가 긍정적인 자극이 되어주기도 하며, 한 줌의 월급은 지푸라기처럼 날아가버릴 수 있는 생의 감각을 현실에 묶어놓기도 한다. 밥벌이는 참 더럽고 치사하지만, 인간에게, 모든 생명에게 먹고사는 문제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생이라는 명제 앞에서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바위를 짊어진 시시포스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나는 이제 더 이상 거창한 꿈과 목표를, 희망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내 삶이 어떤 목표를 위해 나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내가 감각하고 있는 현실의 연속이라 여기기로 했다. 현실이 현실을 살게 하고, 하루가 또 하루를 버티게 만들기도 한다. 설사 오늘 밤도 굶고 자지는 못할지언정, 그런다고 해서 나 자신을 가혹하게 몰아붙이는 일은 이제 그만두려 한다. 다만 내게 주어진 하루를 그저 하루만큼 온전히 살아냈다는 사실에 감사하기로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와 같이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당신, 어떤 방식으로든 지금 이 순간을 버티고 있는 당신은 누가 뭐라 해도 위대하며 박수받아 마땅한 존재이다. 비록 오늘 밤 굶고 자는 데 실패해도 말이다. (256~257쪽)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며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와 배달 음식을 시켜 한 끼 배부르게 먹고서야 겨우 잠들어본 적이 있거나, 잠자리에 누워서 내일은 꼭 굶고 자야지 하고 다짐해본 적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이 책이 큰 위로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