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53)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53)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2.02.28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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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스럽다 못해 천진난만한 얼굴로 앞뒤 없이 생각나는 대로 지껄인다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고 왠지 가슴이 뜨끔한 영천댁이다
나도 모르게 홀딱 빠져 들것만 같네요!”하며 주위를 돌아본다
9월 22일 한가위를 만 하루 지난 보름달이, 디아크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9월 22일 한가위를 만 하루 지난 보름달이, 디아크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이야기로 재미난 곳에 참석치 못하는 여인네의 애타는 심정, 맛있는 음식냄새가 솔바람을 타고 흘려들지만 젓가락 한 벌 얹지 못하고 군침만 삼켜야만 하는 아낙의 타는 마음, 내 집에 잔치가 있건만 붐벼야할 사람은 없고 파리만 날릴 때의 참담함을 어찌 말로 표현할까? 기쁨은 더하여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어 반이라지만 안드로메다란 성운으로 날아가 버린 꿈만 같은 것이다. 젊어서 일까? 아직 겪어보지 못한 때문일까? 두려움이 없어 보이는 영천댁이다. 할머니는 곧장 곤두박질해 갈 영천댁의 삶을 생각하건데 눈물이 왈칵 솟을 지경이다. 하지만 당당한 영천댁은 태평스럽다 못해 천진난만한 얼굴로 앞뒤 없이 생각나는 대로 지껄인다.

“흥~ 까짓것 감골댁의 눈 밖에 나라지 뭐! 그 여편네 눈 밖에 나면 대순가요? 세상에 여편네가 그 여편네 한 사람 밖에 없던가요? 그때는 형님만 찾죠 뭐! 형님마저 이 영천댁을 패거리를 지어 밀어내지는 않겠지요! 멀리 하지는 않겠지요! 그거면 돼요! 지는요 감골댁이 보던지 말던 지 인자 상관 않기로 했네요! 형님! 그나저나 이거를!”하며 손에 든 계란꾸러미를 할머니의 가슴께로 조심스럽게 내민다.

“그럼~ 그럼! 그걸 시방 말이라꼬!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내가 어째 영천댁을 남 보듯 할까? 세상이 없어진다 해도 그럴 수야 없지! 그런데 내가 무슨 공들인 일을 했다고 이러나! 이~ 이라면 내가 미안스러워서 어쩌누! 이것도 돌아오는 은장에서 내다 팔면 다 돈인데!”하며 할머니는 일 없다는 듯 손사래를 쳐서 도로 내민다. 하지만 영천댁도 만만치가 않아

“형님~ 그냥 받으세요! 우리 시어머님이 그러시는 데 형님께서 분명 안 받을 거라며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전해 주고 오라네요! 그란 께 이거 도로 가지고 가면 지가요 맹추 같은 것, 그것 하나 엄벙 땡, 제대로 못 전해! 그렇다고 오죽이나 칠칠맞으면 하나 있는 지 새끼를 죽이려 들어 잘 보기나 하나! 김천댁 본 좀 봐라 며...! 더도 덜도 말고 김천댁 발꿈치만이라도 따라가라며 어머님께 된통 혼 납니더! 아들을 낳았다고 안심하기에는 일러 다 늦게 소박맞을지도 몰라요! 죽어가는 사람 살린다 생각하시고 받으세요!”하며 전쟁터로 향하는 장군처럼 비장하게 각오를 다진 듯 물러설 기미가 없다. 덧붙여서

“어머님이 대신 이 은혜를 어떻게 갚느냐고! 고맙고 감사하다고 꼭 전해 달래요! 조만간 들러 그간 소원했던 점에 대해서 두 손 싹싹 빌어 사죄들인 데요! 다 늙어서 얄망궂고 되바라진 젊은 것들의 속살거림에 휩쓸려 오줌똥을 분간 못해 진정 미안하다고요!”하고 시어머니의 뜻을 고스란히 할머니께 전한 영천댁은 계란꾸러미를 할머니의 손에 쥐어 주고는

“끝순아~”하고는 기계적으로 고모가 누워있는 방으로 들어간다.

등나무와 칡이 좌우로 얽혀 풀어질 기미가 요원해 보이던 동네 사람들과 할머니와의 화해는 그렇게 생각하지도 못한 곳으로부터 꼬인 실타래가 풀어지듯 풀어지고 있었다. 세숫대야 물에 떨어뜨려진 한 방울의 잉크물방울이 풀어지듯, 물에 물 탄 듯 희멀겋게 풀어지고 있었다. 이후 감골댁은 영천댁을 만나 자리에서

“영천댁아~ 내가 성~님을 들볶아서 재촉한 보람이 있었지! 아가야의 숨통이 꼴까닥!, 십 년 감수 했지! 인자 일 없제!”하고 물색없이 생색을 낸 뒤 아기의 안부만 물어 위로하고 걱정을 뿐인데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고 왠지 가슴이 뜨끔한 영천댁이

“아니 예요! 형님께서 그렇게 서둘러 나서질 않았다면 우리 아기는 지금쯤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몰라요! 참말로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백골난망이지요! 이 은혜는 살아생전 차차로 갚아 드리겠습니다”하고 배꼽 인사를 이마가 땅에 닿도록 고개를 숙이는데 감골댁이 급하게 양손으로 어깨를 잡아 저지하며

“아서라! 영천댁아 아~서!, 정작 공을 세운 성~님이 원래 살 복에 도움을 조금 얹은 것뿐이라는데 내가 뭘 했다고 이리 인사치례고! 그리고 영천댁아 그깟 일로 백골난망에 은혜는 무슨 은혜! 이웃사촌이면 당연하지! 내가 그 지경이면 영천댁은 가만있을까? 더하면 더했지...!”하고 정색을 하는데 이전의 감골댁은 결단코 아니었다. 감골댁이 속으로 뼈에 새기듯 다짐한 만큼 할머니가 염려했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할머니의 생각만큼 감골댁의 보에는 물이 차 있지 않았다. 이미 감골댁은 스스로 보의 밑으로 구멍을 뚫어 물을 죄다 흘려보낸 터였다. 설령 감골댁의 보가 터졌다 해도 시냇물만 조금 불렸을 뿐 아무런 힘도 쓰질 못하는 상태였다. 할머니의 염려는 한낱 기우에 불과했다. 이를 계기로 동네의 손아래 아낙들은 할머니를 들어 형님 또는 할머니로 호칭을 통일하여 할머니 집을 무상으로 드나들었다. 전날과는 달리 아무도 눈을 흘긴다거나 흉을 보아 뒤 담화를 하는 동네 사람들은 더 이상 없었다.

동네 사람들이 이런저런 핑계를 들어 수시로 드나들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할머니 집은 자연스럽게 동네 아낙네들의 사랑방으로 변해 버렸다. 그렇다고 할머니가 음식을 한다거나 손이 갈 일은 거의 없었다. 감골댁이 앞장을 선 가운데 부엌을 빌어 시시만큼 가지고온 감자, 고구마, 옥수수, 밀가루, 파 등등의 음식 재료들로 삶고, 찌고, 굽고, 찌지고 한다든지 그도 아니면 아예 집에서 조리 해온 음식을 펼쳐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이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그 어느 날에 수제비를 끓이던 먹던 모습들이 은연중 재현 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가장 신이 난 건 역시 고모였다. 날이면 날마다 넘쳐 나는 사람들의 온기와 활기를 받아들이는 고모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책 읽기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라고 비록 책을 읽는 것은 아니지만 듣는 것이 많다 보니 간접적으로 세상을 돌아다니는 기분이었다. 배운 것 없어 일자무식이지만 머리 자체가 나쁜 고모는 아니었다. 꾸역꾸역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 때면 무엇 하나라도 놓칠까? 이야기 하나하나를 머리에다 아로새겨가는 고모다. 어떻게든 많은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기억하고자 노력을 경주하는 고모다. 저녁을 맞아 사람들이 돌아가고 나면 승패가 끝난 바둑을 복기하듯 하나하나 머릿속에 든 기억을 되새김질 하는 고모다. 간혹 잊어버린 이야기가 있다 싶으면 할머니를 졸라 몇 번이고 되뇌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궁금한 것도, 알고 싶은 것도 많은 고모다. 보통의 경우라면 이미 전부 배우고 익혀 책거리를, 책씻이를 한답시고 동네에 떡시루라도 돌렸겠지만 고모는 이제야 아기가 아장아장 걸음마를 떼듯 사회를 배워나가는 중이다.

그중 고모가 가장 관심을 갖고, 보고 싶어 했던 것은 아기를 가진 아낙네의 모습이었다. 가슴팍을 풀어 헤쳐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아낙네의 모습을 보는 고모는 정신 줄을 놓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고모의 눈은 예사롭지가 않았다. 초롱초롱 별처럼 빛나는 눈동자로 뚫어지게 바라다보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에 아기에게 젖을 물리던 영천댁이

“애~ 끝순아 네가 그렇게 빤히 쳐다보니 같은 여자지만 왠지 부끄럽다”하더니 이번에는 반대로 영천댁이 고모를 빤히 들여다보더니

“성~님! 끝순이 눈이! 끝순이 눈이 언제 저렇게 예뼈졌지요? 같은 여자지만 너무 예쁘다. 마치 말간 호수 같아 나도 모르게 홀딱 빠져 들것만 같네요!”하며 주위를 돌아본다.

영천댁의 말을 좇아 방안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고모의 눈을 찬찬히 바라다보는데 지난날 눈동자 가득 깃들었던 흰자위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그 빈자리를 검은 눈동자가 잔잔한 호수처럼 그윽한 가운데 햇살을 듬뿍 안은 은 비늘, 금 비늘이 대신하여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제야 할머니도 고모의 눈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생각하기를 고모의 몸 안으로부터 알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것이 무당이 예견한 복인지 화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튼 알 수 없는 그 무언가가 고모를 행해서 운명처럼 다가든다는 생각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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