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는 얼면서 마르고 있다 // 나희덕
이를테면 고드름 달고
뻣뻣하게 벌서고 있는 겨울 빨래라든가
달무리진 밤하늘에 희미한 별들
그것이 어느 세월에 마를 것이냐고
또 언제나 반짝일 수 있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대답하겠습니다
빨래는 얼면서 마르고 있다고
희미하지만 끝내 꺼지지 않는 게
세상엔 얼마나 많으냐고 말입니다
상처를 터트리면서 단단해지는 손등이며
얼어붙은 나무껍질이며
거기에 마음 끝을 부비고 살면
좋겠다고, 아니면 겨울 빨래에
작은 고기 한 마리로 깃들여 살다가
그것이 마르는 날
나는 아주 없어져도 좋겠다고 말입니다.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1994년 창비]
빨래가 얼면서 마르고 있다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우리네 삶도 빨래처럼 고통 중에도 알게 모르게 성장하면서 완성되어가고 있다고 읽힌다. 이 시를 대하면서 먼저 드는 생각은 여성이기에 볼 수 있고 여성이기에 느낄 수 있는 감성이라고 생각했다면 남자 분들이 항의하시려나 모르겠다. 그래도 여성만의 부드러운 감성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린 시절 겨울 마당에 늘어놓은 빨래가 동태처럼 얼어 있었던 걸 나이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때는 날씨가 추우니 당연히 물에 젖은 빨래는 얼고 시간이 지나면 마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당연한 일상을 우리네 삶과 연관 지어 감성적인 시로 표현해 낸 여성시인의 감성이 놀랍기만 하다.
첫 행에서 빨래는 얼면서 마른다는 걸 바로 언급하지 않고 뻣뻣하게 언 빨래와 달무리 진 밤하늘에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별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저 얼어있는 빨래는 과연 마를까, 저 희미한 별들도 언젠가 빛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으로 시작해서 빨래는 얼면서 마르고 있다는 걸 확언해 준다. 또 세상에는 희미하지만 끝내 꺼지지 않는 것이 수없이 많이 있다고 희망을 준다.
우리들의 믿음이나 사랑도 약하디 약해 보여서 작은 풍파에도 견디지 못할 것 같지만 끊임없이 이어져가고 있지 아니한가. 반딧불 같은 작은 불씨도 활화산처럼 타오를 수 있듯이 우리 가슴에 있는 작은 사랑의 불씨도 힘을 모아 타 오를 때 우리에게 다가오는 어떤 고난이나 역경도 능히 이겨 나갈 수 있으리라. 지금 당면한 코로나 팬데믹이나 우크라이나 사태 같은 것도 서로 마음을 합해 양보하고 협력하면서 조율해 나간다면 해결의 실마리도 찾을 수 있으리라.
상처의 흔적이 굳어지고 얼어붙어있을지라도 거기에 마음 끝을 부비고 사노라면 분명 좋은 날이 올 거라고 말해 준다. 마지막으로 언 빨래 속에 남아있는 그 옅은 수분에 의지해서 한 마리의 작은 물고기가 되어 깃들여 살겠다는 것은 물고기가 물 없이 살 수 없듯이 우리도 서로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없다면 살기 어려움을 말해 주는 것 같다. 빨래가 마르는 날 아주 사라져도 좋겠다는 마지막 행은 사랑과 믿음이 사라진 세상에서 사는 것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기에 살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읽혀져 긴 여운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