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어4동에 증손자를 세 명이나 둔 84세의 김위남 할머니는 늦깎이 그림그리기에 열심이다. 일주일에 세 번 노인 일자리에 참여하여 용돈도 27만원씩 번다.
할머니는 초등학교만 졸업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6·25가 일어났다. 6학년 되던 해에 보병 상사로 분대장인 큰삼촌이 전공을 세워 특별휴가 왔다가 귀대하다, 휴전협정을 며칠 앞둔 7월에 강원도 양구에서 전사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노란 콩고물 묻힌 말랑말랑한 인절미를 부대 군인들에게 주려고 군용배낭에 짊어지고 갔다가, 부대가 흩어져서 찾아가느라 애를 먹었다는 편지가 온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때 작은삼촌은 고등학생이었다. 마을에 공비가 내려온 날, 컴컴한 저녁때 학교에서 돌아오다 경찰로 착각한 공비에게 총대로 등뼈를 흠씬 얻어맞았다. 그후 탈이 나서 걷지도 못하고 온몸에 깁스하고 누워있다, 작은삼촌은 그렇게 돌아가셨다.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마당에 아버지는 딸을 중학교를 보내줄 엄두도 내지 못했다.
김 할머니는 그림을 잘 그려서 초등학교 군내 미술대회에서 상도 많이 탔다. 공부는 반에서 일등을 했지만 때가 전시이고 과수원이랑 농사를 많이 짓던 터라 일손이 부족하다며, 부모님은 중학교에 보내주지 않았다. 머슴들과 일하면서도 틈틈이 빈 종이만 있으면 그림을 그렸다. 판자에도 그렸다. 메뚜기를 그리면 메뚜기가 금방 어디로 튈 것처럼 보였다. 깡통에 미루나무의 잔가지를 잘라 담고 쇠죽 끓이는 아궁이에 구워내면 스케치 연필이 되었다.
결혼했지만 생활이 여의치 않았다. 일자리가 마땅찮은 남편은 무직 상태였고 반찬가게를 해가며 아들만 셋을 깡다구로 키워냈다.
큰아들은 대학 졸업 후 설계사무소를 했는데 IMF로 일거리가 없어 초등학생이던 손자 둘을 데리고 미국으로 취업 이민을 갔다가, 올해 22년 만에 귀국했다. 큰아들에게서 난 손자 두 명은 뉴저지 대학을 졸업하고, 주한미군으로 한국에 왔을 때 한국에서 결혼을 시켰는데 증손자가 3명이다.
작은아들은 무역회사 직원으로 늘 외국에 머문다. 작은아들에게 난 손자 하나는 시카고대학에서 장학생으로, 코로나로 대학기숙사가 문을 닫아 한국 할머니 집에 와서 학원강사 하며 비대면으로 수업했는데도 장학생이 됐다. 다른 하나는 LA의 대학에서 전면장학생으로 호텔경영학을 전공한다. 또 다른 손자 한 명은 텍사스주에서 직업군인으로 있다. 같은 미국에 살아도 서로 만나려면 자동차로 사흘이나 걸린다고 했다. 미국에 두 번 가서 한 달씩 머물다가 오기도 했다.
큰아들이 미국에서 건축설계 일을 하다가 접고 올해 귀국했다. 아들 3명에, 손자 손녀가 5명, 증손자가 3명이다. 지금은 아들 며느리의 보호를 받으며 몸은 비록 노쇠했지만 범어2동 커뮤니티센터에서 애들이 쓰다만 스케치북에 색연필 사서 매주 화요일마다 범어2동 커뮤니티센터에서 그림그리기에 푹 빠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