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간' 속에서 인생 최고의 가치를 구현했던 한 과학자의 이야기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류비셰프(Aleksandr Aleksandrovich Lyubishev)는 1890년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그에서 태어났다. 1911년 페테르부르그 대학교 물리-재료화학부를 졸업하고, 1923년~1925년 페름 대학교에서 조교수로 근무했다. 1920년대 후반 사마르 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1930년대에는 레닌그라드 연방식물보호연구소에서 농촌 곤충학을 연구했다. 1937년 키예프 생물연구소의 생태부장으로 재직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프르제발스크와 프룬제의 연구소에서 근무했다. 1950년 울리야노프스크 교육대학의 동물학부장으로 부임하여 1955년 65세의 나이로 은퇴할 때까지 그곳에 재직했다. 1972년 8월 31일,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론적인 분석과 권위에 예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연구와 논쟁을 강조했던 류비셰프는 전공인 곤충분류학과 해부학은 물론 유기체의 형태 및 체계, 진화론, 수리 생물학, 유전학, 심지어 분산분석 등에 걸쳐 방대한 저서를 남기며 20세기 러시아 과학사를 견인했다.
철저한 시간 관리와 왕성한 지적 호기심으로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가능성의 최대치를 사용하고자 했던’ 그는 생전에 70권의 학술 서적을 발표했고 총 1만 2,500여 장에 달하는 논문과 연구 자료를 남겼다.
류비셰프가 살아 있을 때부터 번호가 붙여져 제본된 그의 저작 문서들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학문적 내용을 담은 서신, 일상 업무에 관련된 문서, 생물학이나 수학, 사회학 이론을 요약 정리한 글, 일기, 논문, 원고, 회고문, 부인인 올가가 남긴 기록, 수첩, 메모, 학술 보고서, 사진, 독서 감상문 등이 수백 권 분량이나 되었다. 편지나 원고는 일일이 베껴 써두었다가 제본했다. 이렇게 모아진 문서들은 류비셰프의 가족생활과 연구 업무 등 모든 측면을 고스란히 담아놓은 것이었다.
철학과 역사, 문학과 윤리학 등을 전방위로 넘나들며 성실하고 해박한 논리를 전개했던 류비셰프의 원고들은 대부분 사후에 출판되었고, 끊임없는 문제 제기와 논쟁을 거쳐 이룩해놓은 그의 학문적 성과들 역시 그가 죽은 이후에 그 가치가 입증되었다.
류비셰프는 1916년부터 1972년,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그날까지 56년 동안 단 하루도 빠짐없이 자신이 사용한 시간을 기록했다. 그는 하루에 순수 연구에만 소요되는 시간을 10시간으로 잡고, 10시간을 세 부분(1), 혹은 여섯 부분(0.5)로 나누었다. 그리고 분 단위까지 정확히 계산하였다.
그는 업무를 여러 부류로 나눴다. 첫 번째 부류 업무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업무, 즉 집필이나 연구 등과 같이 학문에 관련된 업무이다. 예를 들어서 학술서 읽기, 요점정리, 학술 편지 쓰기 등이 여기에 속한다. 두 번째 부류 업무는 학술 보고, 강의, 각종 세미나, 문학 작품 독서 등 첫 번째 부류에 포함되지 않은 업무들을 포괄한다.
류비셰프는 첫 번째 부류, 즉 가장 창의적이고 고난이도의 연구가 필요한 업무를 제외한 나머지 업무들은 계획대로 진행시키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일기장을 펼쳐 어느 날의 일기를 보더라도 이와 같은 업무 분류와 시간 사용을 볼 수 있다.
1964년 4월 7일, 울리야노프스크.
• 곤충분류학 : 알 수 없는 곤충 그림을 두 점 그림 – 3시간 15분.
• 어떤 곤충인지 조사함 – 20분 (1.0).
• 추가 업무 : 슬라바에게 편지 – 2시간 45분 (0.5).
• 사교 업무 : 식물보호단체 회의 – 2시간 25분.
• 휴식 : 이고르에게 편지 – 10분.
• 울리야노프스카야 프라우다 지(誌) - 10분.
• 톨스토이의 <세바스토폴 이야기> - 1시간 25분.
총계 – 6시간 20분
1964년 4월 8일, 울리야노프스크.
• 곤충분류학 : 어제 그렸던 곤충의 정체를 완전히 밝혀냄 – 2시간 20분.
• 이 곤충에 대한 논문 집필 시작 – 1시간 5분 (1.0).
• 추가 업무 : 다비도바야와 블라헤르에게 편지, 여섯 쪽 – 3시간 20분 (0.5).
• 사교 업무 : 식물보호단체 회의 – 2시간 25분.
• 이동 – 0.5.
• 휴식 : 면도, 울리야노프스카야 프라우다 지(誌) - 15분. 이즈베스티야 지(誌) - 10분
• 문학신문 – 20분. 톨스토이의 <흡혈귀>, 66쪽 – 1시간 30분.
•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황제의 신부> 감상.
총계 – 6시간 45분
여기서 총계 ‘6시간 45분’이라는 것은 첫 번째 부류 업무에 소요된 시간만을 측정한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매일 첫 번째 부류 업무에 사용된 시간이 측정되어 한 달 통계가 나온다. 첫 번째 부류의 업무 외에도 모든 시간이 똑같은 방법으로 계산되었다. 류비셰프는 이렇게 매달, 매년 시간통계를 내고, 이 통계를 바탕으로 다음 달, 다음 해 시간사용 계획을 수립하였다.
시간통계를 내려면 자투리 시간까지 포함해서 자신의 활동 시간을 모조리 알고 있어야 한다. 여기서 먹고 자는 시간은 통계 시간에 포함되지 않으며 모든 시간은 똑같이 귀하게 평가되었다.
류비셰프의 시간통계는 한 해 동안 보냈던 시간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쉴새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조금도 놓치지 않고 꼼꼼히 잡아낸 것이다. 그래서 류비셰프에게는 시간이 늘 충분했다. 시간이 부족할 수가 없었다. 바로 이런 점이 그가 가진 시간의 특징이었다.
시간통계 방법은 그가 늘 현재 시간을 염두에 두게끔 했다. 이 방법을 통해서 류비셰프는 가장 합리적이고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매일 8시간 이상을 자고 운동과 산책을 한가로이 즐겼으며 한 해 평균 60여 차례의 공연과 전시를 관람했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직장에 다녔고, 동료와 후배들에게 애정 어린 편지를 즐겨 썼다.
시간통계 방법은 그의 생활을 매우 분주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일상적인 일들, 심지어는 생활의 불편에 대해서도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류비셰프는 점차 화를 내지 않는 법을 터득했고 사람들이 저지르는 엉뚱한 잘못을 쉽게 용서했으며 연구소 내의 규칙이나 무질서에 대해서 따지지 않고 쉽게 넘어가게 했다. 덕분에 그는 늘 편안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보통 사람들도 류비셰프처럼 살 수 있을까? 자기 인생을 분 단위까지 사전에 계획하여 컨베이어벨트 위에 올려놓는 일이 과연 필요할까?
이 책(2012년 발행, A5, 215쪽)을 읽은 날은 2022년 3월 16일이었다. 3월 17일은 <조선의 도인들>을 76쪽까지 읽고, <장일순 평전>을 96쪽까지 읽었다. 3월 18일을 류비셰프처럼 지내기로 하고, 평소처럼 새벽 4시에 일어났다. 금강경 10독(4:00~5:10, 70분), 아침운동(5:10~5:25, 15분), 조간신문 읽기(5:25~5:55, 30분), 조선의 도인들(5:55~6:10, 15분), 아침(6:10~6:40, 30분), 세수(6:40~7:00, 20분), 밀린 일기쓰기(7:00~7:35, 35분), 조선의 도인들(7:35~8:05, 30분), 아침 잠(8:05~9;05, 60분), 출근 준비(9:05~9:20, 15분), 아파트→도서관(9:20~10:00, 40분), 네이버웹툰(쇼미더럭키짱 90화 슴가리?!, 내과 박원장 24화 로드 투 강남)(10:00~10:25, 25분), 조선의 도인들(10:25~11:45, 80분), 장일순 평전(11:45~12:40, 55분), 점심(12:40~13:10, 30분), 산책(13:10~14:00, 50분), 장일순 평전(14:00~17:00, 180분), 도서관→아파트(17:00~17:40), 저녁(18:00~18:30, 30분), 장일순 평전(18:30~21:05, 155분), 책정리 및 휴식(21:05~22:25, 80분), 금강경 5독(22:25~23:00, 35분), 23시에 취침하였다.
시간을 관리하면서 생활한 결과 독서 시간을 많이 확보할 수 있었다. <조선의 도인들> 92쪽(77~168쪽), <장일순 평전> 317쪽(97~413쪽)을 읽었고, <금강경>은 1장~32장까지 15쪽이어서 15독(讀), 225쪽을 읽었다. 모두 합쳐 675분(11시간 15분) 동안 634쪽(신문, 웹툰 제외)을 읽었다. 저녁 시간에 가졌던 휴식 시간에 책을 읽었다면 더 많이 읽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루종일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 가지 일을 끝낼 때마다 시간을 확인하고 기록하느라 딴생각을 할 수 없었다. 시간을 의식하지 않으면서 여유 있게(?) 사는 것이 습관화되어서 그런지, 시간이 너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류비셰프처럼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3월 19일부터는 원래의 생활로 돌아갔다.
우리 모두는 시간의 소비자이다. 우리는 시간을 여러 가지 생각과 감정, 그리고 일로 바꾸어 나간다. 그런데 전체 시간 중에서 실제 사용하는 양은 극히 적고 대부분을 헛되이 흘려보내는 사람이라 해도 늘 시간이 부족하다고 투덜댄다. 류비세프처럼 관리한다면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겠지만, 아무나 다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류비셰프의 시간통계 방법을 통해 자신의 시간 사용을 되돌아보고 10%, 아니 다만 1%라도 개선한다면 우리네 보통 사람에게는 의미 있는 성취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