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신남역(新南驛)
그리운 신남역(新南驛)
  • 이배현 기자
  • 승인 2022.04.0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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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라언덕에 이름 내어준 신남네거리 도시철도 2호선 신남역
부르기 쉽고 널리 알려진 지명이 스토리텔링에 밀려 아쉬워
대구도시철도 2.3호선 청라언덕역이 있는 신남네거리 전경. 이배현 기자
대구도시철도 2.3호선 청라언덕역이 있는 신남네거리 전경. 이배현 기자

연 전에 서울의 지인이 내려와 도시철도 2호선을 함께 탄 일이 있었다. 반월당역을 거쳐 청라언덕역을 지나는데 그 친구가 노선도를 살피며 두리번거렸다. 웬일인가 싶어 목적지에 내려 물어보니 ‘신남역(新南驛)’이 안 보인다는 것이다. 반월당 옆인 것 같은데 이상하다며 무척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대구에 자주 오는 친구가 아닌데 신남역은 어떻게 아느냐 싶어 ‘청라언덕역’으로 바뀐 경위를 설명했다. 얘기를 듣고 그 친구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역 이름이 사라져서 안타깝다며 서운해했다.

대구에서 도시철도를 타고 신남역이라는 안내방송을 처음 들었을 때 역 이름이 너무 좋다는 생각에 기분까지 덩달아 신나더라는 것이다. 신날 일이 많지 않은 중년의 나이에 ‘신나는 역’이라는 이름을 지은 대구시민의 수준이 상당히 높다는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그렇게 기분 좋은 역이 사라지고 낯선 이름으로 바뀌었으니 섭섭하다는 얘기였다.

사실 필자는 신남역 얘기를 두 번이나 들었다. 코로나가 오기 전 서울 사는 친구들과 부부동반 모임이 있어 3호선 견학을 했다. 그때도 신남역을 지날 때 친구 부인 몇 명이 ‘신남역’ 이름이 너무 재미있다며 즐거워한 적이 있다. 대구에 사는 사람은 잘 못 느끼지만, 신남역이라는 이름의 값어치가 매우 높은 것이다.

도시철도, KTX 등 역이름 짓는 것이 사람 이름 짓는 것보다 몇 배 더 어렵다고 한다. 시민 편의, 역사성, 문화적 의미, 주변 상권 등 고려해야 할 점이 많고 이해 당사자 간의 갈등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2005년 신남네거리에 도시철도 2호선 역이 준공되었을 때는 ‘서문시장역’으로 이름이 붙여졌다. 신남네거리라는 위치에 비추어볼 때 신남역이 타당하지만, 인근 서문시장의 힘에 밀려 이름을 내어 줘야 했다.

대구근대문화골목 2코스 출발점인 청라언덕 전경. 이배현 기자
대구근대문화골목 2코스 출발점인 청라언덕 전경. 이배현 기자

2014년에 3호선이 준공되고 진짜 서문시장역이 생기면서 이곳은 비로소 신남역으로 제 이름을 달 수 있었다. 그러다 ‘대구근대골목 관광자원화 사업’이 추진되면서 신남역은 다시 시련을 겪게 되었다.

근대골목 시작점을 동산병원 선교사 주택이 있는 동산(東山)으로 잡으면서 ‘청라(靑蘿)언덕’이 부각 되기 시작했다. 대구 출신 작곡가 박태준의 가곡 ‘동무생각’ 가사에 나오는 청라언덕이 선교사 주택이 있는 동산(東山)이라는 해석이 나오면서 청라언덕 띄우기가 급물살을 탔다.

청라언덕은 대구와는 연고가 없는 이은상 시인이 작사한 ‘동무생각’에 나오는 이름이다. 대구 토박이들도 모르는 청라언덕이 대구시의 스토리텔링에 힘입어 관광상품으로 대박을 친 것이다.

근대골목과 청라언덕이 뜨면서 유행에 민감한 공무원들이 2019년 1월 신남역을 청라언덕역으로 잽싸게 바꿨다. 이에 신남네거리 일대에서 생계를 이어온 상인들 반발로 한 달여 만에 청라언덕역을 신남을 부기(附記)한 '청라언덕(신남)역'으로 다시 바꿔야 했다.

신남네거리는 대신동의 신(新)자와 남산동의 남(南)자가 합쳐진 이름으로 반고개네거리, 반월당네거리 등과 함께 1백여 년 이어오는 지명이다. 당연히 역이름도 시민들이 쉽게 알고 역사적 의미를 갖춘 신남역이 마땅하겠으나 경제적 논리에 밀려 두 번이나 쓴잔을 마셔야 했다.

반면에 청라언덕은 스토리텔링에 힘입어 대구근대골목과 함께 문화관광 자원으로 완전히 자리를 굳혔다. 신남네거리 일대에서 살아오던 시민들은 섭섭하겠지만 대구시로서는 크게 성공한 장사인 셈이다.

반월당에 볼일을 마치고 도시철도 2호선을 차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청라언덕역이라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과거 신남역은 영어, 중국어, 일본어로도 유창하게 안내되는 발음이다. 그런데 청라언덕역이라는 어려운 한국어를 만나 도시철도 안내방송도 통역에 쩔쩔매고 있다. 타지 사람들이 ‘신나는 역’이라며 좋아하던 신남역이 문득 그리워진다.

청라언덕에 세워진 박태준 작곡, 이은상 작사 '동무생각' 노래비. 이배현 기자
청라언덕에 세워진 박태준 작곡, 이은상 작사 '동무생각' 노래비. 이배현 기자